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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17. 2023

철 지난 바닷가 동네 산책

도시스케치_영진

1일

햇살이 너무 뜨겁다. 하늘과 바다는 그 경계를 알 수 없이 서로 푸르다. 바람이 불지 않지만 바다 위를 지나온 공기는 차갑다. 건물도 길도 낡았다. 차들은 다소 느긋하게 오간다. 나는 바다를 옆에 끼고 천천히 걷는다. 낯선 도시지만 이런 낯섦이 다정스럽게 느껴진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데 무섭도록 내 앞뒤에 아무도 없다. 도시에서 붐비던 사람들에 익숙한 나는 반대편에서 누군가라도 걸어와주면 그게 반가울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차들만 지나가고 나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걷고 또 걷는다. 조금 더 걸으면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가 나온다고 푯말이 써져 있다. 그런데 사람이 걷기 좋게 만들어 놓은 데크길은 끝났다. 찻길과 보도의 경계가 사라졌다. 차만 다니고 걷지 말라고 길이 말한다. 멀리 보이는 해변을 쳐다보다가 돌아오는 길이 멀 것을 알고 발걸음을 돌린다. 오후는 그렇게 또 지나간다.

저녁 바다에는 안개인 듯 미세먼지가 수평선이 안 보일 정도로 뿌옇게 덮여있다. 낮보다 차들이 많아졌고 사람도 많아졌다. 마주 오는 거리의 자동차 불빛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오늘만이 아니고 이런 저녁 시간의 저 주황색이 도는 자동차의 불빛을 좋아했고 좋아한다. 차들이 지나는 거리의 뒤로 유독 하얀 건물의 불빛이 눈에 띈다. 손님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넓은 통창을 가진 하얀 건물에도 빛이 나온다. 

하늘이 탁해서 석양은 보지 못했는데 건물들이 석양을 대신해 빛을 내준다. 자동차 불빛과는 다른 하얀빛이다. 가로수에도 환하게 불이 켜진다. 우중충했던 길이 밝고 따스해진다. 나는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지만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다. 저녁 운동을 나온 아주머니 두 분이 아까부터 나와 몇 번을 마주친다. 해변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아저씨가 보인다. 낚시를 하는 일행들도 보인다. 


띄엄띄엄 떨어져서 사람들이 서로의 바다를 즐기고 있다. 나도 그 안에 있다.  


2일

오후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텅 빈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가 유명한 동네인데 나는 이곳에 와서 카페에 가지도 않고 커피를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어제저녁 산책하는 길에 붉은색의 카페 이층에서 커다란 통창의 문을 열어 놓고 그 앞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사람을 보고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 건물은 붉은색이었고 주파수가 카페의 이름인 듯 커다랗게 건물 위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이층 가운데 통창이 열려있고 단 한 명의 손님이 그 앞에 앉아있었다. 

오래전 내가 뉴올리언스에 갔을 때 사람이 많은 바에서 보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둘의 공통점은 뭔가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 보았던 그 붉은 카페 옆에 있는 다소 어둡고 넓은 카페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에서 엎드려서 자던 아르바이트생 두 명이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나는 오늘의 커피를 시키고 입구와 커피를 만드는 카운터가 정면으로 보이고 왼쪽으로는 큰 창과 외부 테이블 넘어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빛도 안 들고 초 겨울이라 난방도 하지 않았다. 손님도 나밖에 없어서인지 공기가 차가웠다. 잠시 후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팔십 년대쯤 집에서 쓰던 것 같은 찻잔에 담겨 나왔다. 나는 이렇게 꽃무늬가 있는 가벼운 찻잔이 어색하고 싫다. 커피는 향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얇은 찻잔은 온기를 금방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내서 커피가 금세 식어버렸다. 

바다에서 큰 파도가 치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거리에 사람들은 없었다. 커피가 몇 모금 남았을 때는 거의 아이스 수준으로 차가워졌다. 그때 바람을 헤치고 여자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목소리가 조용한 카페에 울렸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문과 대화를 들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남아있는 한 모금의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천천히 카페를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동네의 커피는 두꺼운 머그컵에 담겨 나와야 쓸쓸하지 않다.

    

3일

바다를 따라 걷는 길에 사람들이 보인다. 아주머니 두 분이 저녁 운동을 나왔는지 몇 번을 왕복해서 길을 지나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해가지기를 기다리는 나의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어제는 너무 일찍 집에 들어가서 해가 진 바닷가를 침대에 누워서 봤다. 

해지는 바닷가를 걷고 싶다고 느낀 건 빛 때문이었다. 가로등과 건물에서 환하게 빛이 나오고 검푸른 바다는 모래사장으로 다가오는 하얀 파도만이 조금 보였다. 도시에서와 별다를 것 없는 건물과 가로등의 불빛이 유독 따스하게 보였다. 저 빛들 속에서 저녁 바다를 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너무 일찍 나온 걸 깨달은 것은 바다를 따라 한참을 산책하고 돌아와도 가로등이 켜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생각보다 어둠은 서서히 왔다. 두 번째로 바다를 따라 산책을 하고 중간쯤 돌아오고 있을 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때마침 길가에는 유리로 된 삼층짜리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빛도 환하게 서서히 깔리는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를 거리의 불빛을 즐기면서 바다를 따라 걸었다. 그때 멀리서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작은 테이블을 펴고 와인을 마시는 여자가 보였다. 옆에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편해 보였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이 어촌 동네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아 살짝 놀랐다. 

바람은 불고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 여자는 여유로워 보였다. 드디어 그 여자가 있는 해변 옆 길을 지나갔다. 자세히 여자를 보고 싶었지만 나는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쳐 해변이 끝나는 길까지 걸었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걷는데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쓰레기통 앞에 서서 먼바다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아까 모래사장에서 테이블을 펴고 혼자 와인을 마시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철 지난 바닷가 동네 산책은 아름답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다. 그러나 늘 치는 파도처럼 자기만의 리듬과 안정감이 길 위에 사람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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