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S Sep 05. 2023

차는 앉아서 술은 서서

도시 스케치_ 런던 3

영국영어와 미국영어의 차이가 많은 건 발음은 둘째치고 단어의 차이가 컸다.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용어도 영국의 비즈니스 용어는 많이 달랐다. 분명히 에이라고 부르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들어보면 비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지 부르기를 에이라고 부른다. 여기는 비를 에이로 부르는구나 그렇게 이해하면서 지내다 보니 그런대로 출장은 견딜만했다.  


출장 첫날이라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한참 회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점심시간이라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회의에 집중하기에도 지루한 참이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흰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천천히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카트에는 레몬조각이 들어있는 투명한 생수병과 뜨거운 물이 담긴 포트가 있었다. 그리고 밑칸에는 차를 마시거나 물을 마실 수 있는 도자기 잔과 유리컵이 있었다. 그녀는 비행기에서 음료수를 서빙하듯이 회의실을 돌면서 조용히 물이나 차를 서빙해 주었다. 커피를 담은 투박한 도자기 찻잔과 생수를 따라 준 유리컵은 받침까지 함께 책상에 놓였다. 

갑자기 처음 일본 출장 때가 생각났다. 사무실 어디로 오라고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는 메일을 받았다. 점심 도시락을 제공해 주는데 자기가 마실 생수는 꼭 가져오라는 추신이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처음에는 이메일을 여러 번 읽었다. 점심은 주는데 물은 안 주는 게 너무 이상했다. 의심스러웠지만 호텔 옆에 있는 슈퍼에 가서 생수를 한 병 사가지고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물조차도 무료가 없었다. 회사 내에서 물이 먹고 싶으면 복도에 있는 자판기를 이용하거나 회사 제일 위층에 있는 직원용 편의점에 가서 사 먹어야 하는데 물값이 슈퍼보다 비쌌다. 왜 물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같은 회사인데 일본 사무실과 영국 사무실은 왜 이렇게 다른지 또 한 번 놀랐다. 나를 놀라게 한 친절한 대인 음료 제공 서비스가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있었다. 특별히 호텔을 빌려서 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는데도 서비스가 참 좋았다.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시설이 없는 것도 아닌데 회사 안에 이런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클래식한 대인 음료 서비스 덕에 회의가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점점 영국에서의 출장에 익숙해진 어느 날 저녁이었다. 퇴근 후에 간단히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자고 해서 오늘은 어디 가나 기대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술을 마시러 간 곳은 회사 건물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보통 낮에는 온갖 종류의 차가 진열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도 먹고 차를 마셨다. 저녁때가 되니 한편에 음료 냉장고의 열쇠가 풀렸다. 그 안에는 여러 종류의 와인이 있었다. 마시고 싶은 것을 골라 마시라고 했다. 회사 캔틴에 이렇게 와인이 가득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와인잔은 플라스틱 잔이었다. 그래도 플라스틱 와인잔에 내가 먹고 싶은 와인을 따라 마시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몇 번은 퇴근 후에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축구를 예약해서 보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명의 직원이 자주 맥주를 마시면서 회식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땅값과 인건비가 비싸서 그런지 내부에 앉아서 음식을 대접받으면 비용이 비쌌다. 런던 시내 빌딩들 사이에는 골목 뒤에 작은 펍들이 많았다. 양복 입은 직장인들이 낮이나 저녁이나 시간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서 라거를 가볍게 한잔 마신다. 건물의 앞이나 뒤에 창문밑 공간에는 다 마시고 놓고 간 유리잔이 놓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서서 마시다가 잔을 놓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실제로 펍에 앉아서 음식과 라거를 한두 잔 마시니 너무 비쌌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서서 즐기는 게 비용적으로 이득이었다. 

바에 들어가지 않고 앞에 서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매일 저녁 바글 거린다. 바 내부에는 항상 테이블이 비어있다. 겨울 이어도 거리에 서서 라거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영국이 인당 술 소비량이 많은 나라가 괜히 된 게 아니다. 이렇게 오가다 마셔야지 앉아서 마시기 시작하면 다들 출근도 못할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런 거리의 북적 거림을 헤치고 호텔로 돌아간다. 공기가 촉촉하고 춥지가 않았다. 겨울 런던은 거리에 서서 술 먹기 딱 좋은 날씨다.  

이전 17화 유후인 주택가 골목 담배 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