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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7. 2023

아름답고 슬픈 도시 3

소설 같은 현실_거기 걷지 못하는 자

여름은 아니지만 여름보다 더 덥고 뜨거운 날이었다. 바람은 한 점도 불어오지 않았다. 사방이 탁 트여있었고 멀리 바다와 논이 보였다. 논은 녹색이고 바다는 검푸른 색이었다. 그리고 논을 가로질러 하얀 시멘트 길이 직선으로 쭉 뻗어있었다. 나는 무작정 차를 세웠다. 그 길을 걸으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중간쯤 걸어가다가 거기서 그냥 멈췄다. 더 움직이기에는 내 위에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의 기척은커녕 새소리도 벌레소리도 물소리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와 논과 바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이 조용히 있었다. 다시 돌아왔다. 사실은 뜨거운 태양보다 아무도 없는 사방의 고요가 무서웠다.


내가 걸어왔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세 갈래 길이 있고 세 개의 전봇대가 있었다. 그리고 논도 보였다. 바다 쪽으로 가는 길에 봤던 논이 넓은 초록이라면 맞은 편의 논은 작은 세모 또는 마름모의 논이었다. 역시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옆에 나무 밑에는 나의 반쯤 되는 커다란 돌 위에 마을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여기가 마을이라면 집도 사람도 보여야 하는데 그저 그 커다란 돌만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저기 논 너머에 언덕 뒤에 마을이 있으려나 짐작했다. 그렇다고 적막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을 이름이 쓰여있는 돌 뒤편으로는 파란식 테두리와 뿌연 유리로 되어있는 작은 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만든 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버스는 지나가지 않았다. 그때 나의 눈에 맞은편 전봇대 밑에 놓여있는 검은색 유모차 모양의 지팡이가 보였다. 유모차 모양의 지팡이는 짐을 실을 수 있는 칸이 유모차보다는 작고 낮게 붙어있다. 세월의 힘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팡이 유모차의 앞부분 기둥을 하얀 노끈으로 칭칭 감아서 전봇대에 묶어놨다. 저 지팡이의 주인은 저기에 유모차를 파킹하고 어디에 갔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켜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말없는 유모차 모양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그걸 전봇대에 묶어 놓고 사라진 주인을 상상했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걷는 게 느려지면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길을 걸어 다닐 수 없다. 남들보다 늦게 걷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밀쳐지고 부딪혀서 넘어질 수도 있다. 빠르게 가야 하는 사람의 진로를 방해해서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집 앞의 공원정도는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아무도 없는 이 마을에서는 노끈으로 칭칭 감아놓은 지팡이 유모차의 주인도 어디든 갈 수 있다. 누구도 진로를 방해한다고 밀치거나 욕하지 않을 것이다. 유모차 지팡이에 의지해서 엉거주춤하게라도 걸을 수 있다면 몇 시간을 걸려서라도 어디든 갈 수가 있다. 


너무 더운 날이었다. 내가 바라던 대로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또 쓸쓸했다. 도시는 너무 많이 마주쳐서 사람을 피하고 싶다. 여긴 아무도 없어서 누구라도 마주치고 싶다. 차 한 대가 지나갔다. 나도 다시 차에 탄다. 여기 아무도 없는 논과 바다에 둘러싸인 마을에 내가 잠시 왔다 다시 떠난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으니 누구도 증명해 줄 수 없다. 그저 나와 구글만이 알 뿐이다. 


노끈에 묶여 전봇대에 붙어 있는 유모차 지팡이에게도 인사를 한다. 세월의 힘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도시에는 그런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빨리 움직이지 못하면 뒤쳐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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