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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10. 2023

빛바랜 컬러 사진

익숙한 나라의 낯선 도시_정선

이 도시는 색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오래전 크레파스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의 색이다. 스페인 순례길을 걷는 여행자들이 들리는 마을처럼 소박하지만 자연과 어울리고 오래되었지만 깔끔한 그런 균형은 없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감탄과 질문이 줄줄 나올만한 건물이나 다리는 없다.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와 시멘트들이 그리고 간판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여긴 사람들의 숨겨둔 내면을 치장 없이 보여주는 도시다.   


기차역 쪽으로 가기 위해서 이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걷는다. 주변에는 호텔이나 모텔이 있고 길가와 공터에는 먼지 쌓인 자동차들이 즐비하다. 도시는 작고 작은 천이 흐르고 있다. 기차역까지 가는데 그렇게 많이 걸을 필요도 없다. 시내를 거대한 콘크리트의 모텔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다리를 건너 낮은 건물들이 있는 곳이 시내다. 

문득 아주 어릴 적 찍은 컬러 사진이 떠오른다. 도시의 인상이 색 바랜 컬러 사진 같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렇다. 컬러풀 한 간판들과 콘크리트 다리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모두 자신을 표현하고 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참 이상하기도 하다. 초점을 잘 못 맞춰서 찍은 오래된 컬러 사진이 눈앞에 있다. 


나는 조용한 거리의 정적을 비집고 걷는다. 누구 하나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낮인데 왜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고 이토록 조용한지 마치 환한 한밤중 같다. 기차역은 시내의 위쪽 언덕에 있다.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가서 역에 갔다. 역 또한 시내와 다르지 않다. 조용하고 사람은 없다. 나는 역무원이 앉아 있는 창에 대고 질문을 한다. 그녀는 언뜻 우리에 갇힌 곰처럼 보였다. 몹시 따분하지만 계속 따분하고 싶어 했다. 대답을 간신히 몇 마디하고 시간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시간표를 보고 기차표를 샀다.

 

다시 시내로 왔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같은 자리이다. 아까 지나 온 길을 또 지나간다. 기차 타기 전에 둘러볼 거라도 있나 하고 호텔을 일찍 나온 게 큰 잘못이었다. 하지만 작은 도시를 이십 분 이상 걸어 다니다 보니 자세히 보게 된다. 정적만이 도는 조용한 도시에서 오직 혼자 화려하게 번쩍이는 간판이 있다.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전당포 간판이었다. 시내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알아보게 되었다. 간판도 못 알아보는 내가 한심한 건지 아니면 주위의 시선을 못 끄는 간판이 한심한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끝이 보이는 시장을 걸었다. 이십 미터 정도 되는 일직선의 시장투어를 마치고 편의점에 들어가서 음료를 샀다. 편의점 옆으로는 천이 흐른다. 그 앞으로 버스 정류소 앞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우르르 커다란 버스를 탄다. 카지노로 가는 버스다. 모두 원하는 것은 제각각인 듯 포장하지만 결국 우리는 빨리 그리고 많이 부자가 되고 싶다. 여기는 얼마든지 숨기지 않고 내면을 드러내도 되는 곳이다. 어디로 가는지 서로 알고 싶어 할 필요도 없다.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보이던 도시의 인상이 이해가 된다. 도시가 주연이 아니라 여기 머물다 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주연이다.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아웃포커싱이 되어있었다.  


언덕 위의 역으로 가기 위해 시내를 다시 걸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내 앞으로 담배를 피우며 한 사람이 지나간다. 그리고 커다랗고 화려한 간판이 번쩍이는 전당포로 들어간다. 거리에 흐르던 무거운 정적을 헤치고 그가 남긴 담배 연기가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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