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엄마는 심장병이 있었다.
그래서 심장에 기계판막을 삽입하고 지내야 했다.
오래 앓은 심장의 문제로 신장도 점점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뤼디거 달케의 책 <몸은 알고 있다>를 읽는 과정에서 나는 엄마를 공격한 아픔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서서히 알아갔다.
심장이 좁아지는 협심증은 피를 흐르게 해주는 혈관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좁아져 있어서 심장은 더 이상 충분히 영양분을 얻지 못하게 된다.
심장 증상들은 인간에게 억지로 자신의 심장에 귀 기울이도록 만든다.
심장병 환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너무 소홀히 다루는 사람들이다.(중략)
감정에 대한 불안이 너무나 커져서 오직 절대적인 규범만 신뢰할 뿐이라면, 인공심장 박동기를 이식받는다.
심장마비는 주먹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한 모든 일들이 모여 생긴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평생 말없는 아버지와 살았던 엄마는 화병 비슷한 게 있었다. 쾌활한 성격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발산하지 못한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와 가족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엄마의 내면에 마구 흩뿌리고 싶었던 마음과 생각들이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표출되었다면 어땠을까.
신장은 배우자 관계의 영역을 대표한다.
콩팥은 인간들 사이의 밀접한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배우자관계에 해당한다. 배우자 관계에서 생기는 가장 큰 위험은 항상 문제인 행동 방식들이 오직 상대의 문제일 뿐이며, 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오류가 신체상으로 드러나면 콩팥도 중요한 성분들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이 배우자에게서 자신을 깨달아야만 하듯이, 콩팥 역시 외부에서 오는 '이물질들'이 자신이 성찰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성분들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오래된 문제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정작 자신이 흘러가야 하는 길목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단 이것이 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린 우리의 정신의 길을 막고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안에 고여 있는 것을 꺼내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그것을 부정한 것이다. 부정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지만, 부정 에게 마음의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실재는 사라지고 슬픈 찌꺼기만 남아서 몸의 증상으로 말하게 한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한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으로.
무용가는 춤을 추는 것으로.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꽃과, 나무와, 새들도, 그들 자신으로 보여주고 돌들도 돌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살아있음의 증상을 내 마음에 말해주지 않으면 몸은 말하지 않은 마음을 위해서라도 증상을 만든다.
마음과 정신을 들여다보고 살펴보아야 몸의 증상들이 전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양극성을 이해하고 그것들이 서로 보완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면성에서 벗어나 모든 반대극들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병의 증상에 대해 내가 가진 한쪽으로 치우친 관념 때문에 다소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과 몸이 연결되어 있으며, 병의 증상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숨은 뜻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나는 그림과 글로 나를 말한다. 다소 어눌하고 어설프지만 순정한 내 눈의 표정과 일치하는 것을 느낀다.
이젠 특정한 증상이 내게 오면 내가 정신과 마음 안에 어떤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초록 글씨 : 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 달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