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

by 캐리소


제 안에 오래 갇혀있다가 나오게 된 계기는

나에 대해 이야기해 준 어떤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제게 "넌 키가 작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기분이 나쁘거나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는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바람도 자느라 아무 미동도 없는 물결 위를 무언가로 톡 건드린 듯한 진동이 왔습니다.


아,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키가 작은 아이'로 보이는구나, 하는 인식이 생겼거든요.




저의 의식은 아래의식과 위의 의식으로 나뉩니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저는 수면 아래에 있는 흐릿한 상태였습니다. 제 자신을 나로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 없었달까요?

마치 산소가 희박한 물속에서 스크래치가 많이 나있는 수경을 쓴 것처럼 시야가 뿌옇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겠지만, 그 이야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에 의미가 담기지 않았으니 말이죠.

설사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저의 어린 시절 전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과거가 지금의 현재를 만들었으니까요.


제 눈에 다른 사람들은 큰 범선으로든, 거대한 크루즈로든, 보통의 나룻배로든, 작은 통통배로든 시간의 물결을 따라 지금에 이르렀다고 여겨집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물결, 수면, 위, 아래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흘러왔다기보다 불쑥 올라왔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물결 아래에 있던 의식이 물결 위로 꿀렁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계속 달라지는 물결 위를 만났습니다.


수직상승의 이미지도 아니고 나선형 구조도 아닌데... 아, 뇌파의 모양과 흡사한 구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림으로 제게 설명하고 싶어서 그려봤습니다.



위로 아래로 꿀렁이면서 저는 저라는 우주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습니다.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것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고 눈물이 치솟고 가끔은 물결 위의 세계와 내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만방자한 생각도 해가면서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렇죠.

오만방자!

제가 무엇이라고 저를 판단하겠습니까?

전 저를 만든 창조자도 아니고, 제 바깥으로 나가서 저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수면 아래는 수면 위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하다고 믿어집니다.

그곳은 제가 저를 벗어나(의식에서) 희미하고 몽롱한 상태를 받아들이게 되거든요. 여기는 원래 이런 모양이구나, 하고요.


그저 가끔 제 안에 있기 때문에 좁아서 버둥거리고 답답해서 눈물이 치솟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면 위로 올라오면 달라집니다.

너무 선명해서 제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수면 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저의 감정의 파장도 널을 뜁니다.


수면 위에서 저는 아래에서의 저와는 정말 다른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예요.


수면 위에는 아래와 다르게 이상한 쾌감도 있습니다. 별이나 꽃 같은 희열이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제 인식 위에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작고 가볍고 찰나적이라는 생각이 더욱 커집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내 존재를 더 존재답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내 인식과 의식에서는 물결 위가 더 크고 더 광대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세상이 물결 아래였구나, 하는 생각이 선명해집니다.

지금 물리적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바로 물결 아래의 세계지요.


하지만 물결 아래의 세계가 물결 위의 세계를 만드는 모티브가 되기도 합니다.

물결 위의 세계는 물결 아래 세계의 모루고요.


나는 어떤 관점으로 얘기해야 할까요?

물결 아래의 관점일까요?

물결 위의 관점일까요?


어떤 작가님은 자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희미한 정체를 점점 선명하게 인식 중이라고 하셨는데 아직입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부하길 참 잘했다.'라고 하시는 그분의 말이 퍽 부럽기도 하지만, 그 결론을 얻기까지 자신을 단련한 오랜 시간들을 떠올려 봅니다.

여전히 자신을 궁금해하는 그분의 결연한 입매를 생각합니다.

어쩐지 멋집니다!




그런데 조금씩 오래 물결 위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제가 보입니다. 위와 아래로의 꿀렁임이 살살 줄어듭니다.

저를 조금씩 궁금해하는 내적동심원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언젠가 호수 전체를, 바다 전체를 헤엄치듯 넓혀갈 동심원이 그려집니다.




모루 :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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