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지고 있다

by 캐리소


내가 50대의 초입에 진입했을 때 우리 집 막내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그때 난 아들과 함께 매주 상담도 다니고 양육코칭도 받느라 내가 50이 되었는지 어쩌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아들은 주의력결핍으로 학교 생활을 어려워했고 딸만 키운 난 아들이 처음이라 허둥대고 있었다.


두 누나들이 다 독립해서 나가고 막내가 곁에 있으니 난 중년을 인식하지 못하고 엄마라는 강한 책임감에 둘러싸여 있었다. 두 딸을 키워 내보내고 늦은 나이까지 아들을 키우느라 정작 나를 키우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늙은 엄마인 게 미안해서 아들에게 늘 부채의식이 있었다.

'너무 늦게 너를 낳아 외롭게 한 것 같아 미안해.'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돌주머니를 찬 것처럼 묵지근했다.


그러면서 종종 두 손자를 돌봤다.

두 딸의 도우미도 되었었고 손자들의 할머니, 남편의 아내로 종종거리며 지냈다.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러했겠지만, 나는 희미해졌고 가족들에게 버팀목은 아니라도 고임돌의 존재로 나를 사용했던 시간이었다.





그때의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참 열심히 살았다.

'십 대 자녀와 소통하기' 같은 메모를 적어놓고 아들의 마음을 통역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상담사 선생님의 미션을 하나하나 이행하며 아들과의 접점을 찾으려 애썼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문제라고 여기는 아이를 돕고 싶었다.


상담사인 타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일은 나 자신에게 안쓰러웠다. 내 존재가 계란 흰자와 노른자로 분리되는 것처럼 여상(如常)하면서도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아기 때 버려질뻔한 트라우마에 대해 알게 되었고, 피부접촉경험과 부모와의 소통 경험이 적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알았다.


근데 그게 뭐!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나는 말한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지나가버린 일을 가져와 현재의 서랍에 쑤셔 박고 싶지 않다.

이럴 때 쇼펜하우어는

모든 불쾌한 것은 가능한 한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도록 차라리 매우 산문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좋다. 주)

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의 의식이 이 시선을 따라가는 듯하다. 산문적이고 냉정한 모터를 가동함으로써 날카롭게 베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프로세스가 작동된다.

그래서 자제심을 잃지 않으려 내 생각을 분류해서 정리해 둘 서랍을 갖추고 하나의 서랍을 열 때는 다른 서랍을 전부 닫아두려고 주) 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패턴이 동일하지 않겠지만, 난 이 나이가 되니 과거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에 돌입한 기분이다. 얼렁뚱땅 십 대 아들의 엄마, 두 남자아이의 할머니가 되고 나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계망이 유입되었다.

그러니,

난 더 현명해져야 했고 맷집도 튼튼히 길러야 한다.

더 이상 희미해지지 않기 위해서,

내게 불리한 일들이 오더라도 쉽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이제 오십 대도 후반으로 돌입했다.

요즘 십 대 기준으로는 평균수명 백사십 세까지 산다고 한다. 내 나이 기준으로는 지금 내 생애 절반의 굴곡을 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앞으로의 날들을 쇼펜하우어의 충고대로 소망에 한계를 두고, 욕망의 고삐를 당기고 , 분노를 억제하면서 절제와 인내의 날들을 살아가야겠다.




다 져버린 장미와 한창 아름다웠던 장미


찬란했던 짧은 한때를 벅차게 피던 장미가 이제 서서히 지고 있다. 5월의 여왕답게 화사하게 등장했다가 날이 점점 뜨거워짐에 따라 꽃도 작아지고 잎사귀 색도 진해지고 꽃잎도 하나둘 자신을 떨군다.


지는 장미를 보니 시가 저절로 나온다.

제목은 뭘로 해야 하나.


나도 잘 지고 싶다.

사람들이 뭐라 해도 괜찮을 정도로


장미는 장미로 지고

나는 나로 지고

잘 지면서 살아야지

전처럼 이기려고 들지 말아야지

살면서 지는 연습

지면서 사는 연습

그렇게 살아야지

마지막에 우주에 스며들 때도

고집스러운 얼룩처럼 붙어있지 않고

연한 분홍 꽃잎처럼

가볍게 순하게

지워져야지

아무것도 무겁지 않게

어떤 것에도 힘을 풀어

다 놓고 져야지

그렇게 져야지




주)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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