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대가 되고 달라진 것 중 하나는 관계망이다.
가볍게 아는 지인들 위주였던 얼기설기한 관계망에 미세한 밀도가 생기고 조금은 쫀쫀해졌다.
지인 안에는 친구도 포함이다. 내게 친구들이라 봤자 동창이다. 그저 오래 알던 사람들이고 30년 이상의 시간을 끊기지 않고 이어왔다는 것 빼고는 특별할 것도 없는 사이다. 그러면 난 뭘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을까?
독특하고 유별나고 남다르고 각별한 것이 내게 있을까?
그렇다고 규정지으면 그럴 수 있겠지만, 난 별나고 특이하게 재미없는 사람이라 각별한 관계를 이어오는 친구나 지인은 없는 것 같다.
누군가와 짧은 시간을 나누고 잡다한 일상대화가 오고 가고 그 이상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건 내게 조금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난 나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게 쉽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비교적 가족끼리 합이 잘 맞는 사람들을 보면 부모가 얼마나 가정의 중심을 잘 잡는지 내가 다다를 수 없는 이상적인 부모의 모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딸들이 모두 성인이 되고 사위와 손자들이 생기자 과거 서로를 그저 가족의 범주에 넣었던 우리들의 관계가 내밀해지고 살짝 특별해지면서 뭔가 마음속 구역 중 한 구역이 진중한 색으로 개념화해서 자리 잡은 것 같다.
으로 말이다.
사실 우린 서로 너무 바빴다.
나와 남편은 살아 내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크느라 바빠서 서로의 얼굴과 존재를 깊이 새기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데 빛이 작은 문틈으로 빼꼼 자신의 발을 밀어 넣듯이 내가 오십이 넘어 후반이 되면서 우리는 조금 달라진 서로를 발견하고 멋쩍게 굴기도 했다. 꼬마적의 불알친구를 몇십 년 만에 만난 것 같은 계면쩍음이 괜히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우선은 내가 심적 여유가 생겼다.
매일 도장 깨기 하듯 빠듯하게 살아가느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창고 깊숙이 처박아두었었다. 이젠 아이들도 제 길을 찾은 마당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펼치면서 구겨진 내 존재를 쌓아가다 보니 나의 취향과 진실을 식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신없을 땐 감히 들춰보지 못한 아이들의 마음과 그때의 상황, 그들이 겪었을 괴로움이 심연에 물이 차오르듯 찰랑일 때가 있다.
그때는 깊어진 그들의 경험에 놀라고 진중하게 오고 가는 대화에는 명랑하고도 아쉬운 즐거움이 배어난다.
사위와 딸이 서로 배려하고 아끼면서 지내는 것을 보면 단전 깊은 곳이 흐뭇함으로 차오른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나온 생의 돌길을 그들은 걷지 않았으면 하는 오만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손자들과도 이젠 일방적 양육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대화가 가능하다.
할머니의 생각을 존중하는 첫째는 할머니의 취향에도 관심이 많아서 함께 움직이고 싶어 한다.
책 읽기, 멍 때리기, 이야기 나누기, 그림 그리기.
녀석과 함께 하는 취미다.
둘째는 자기가 따르는 형이 좋아하는 할머니라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매일 사랑한다고 한다.
우린 서로에게 다리가 된다.
첫째 딸과 둘째 딸, 그들과 늦둥이 남동생, 늦둥이 울 아들과 두 손자, 우리 남편과 사위, 사위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연결된 다리 역할을 한다.
서로의 어려움에 통역자가 되고 오해를 풀어주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우린 오랜 시간 따로 있지만, 자신으로 서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풍경을 만든다.
나는 지금 여기서 좌절 중이다.
매일 어제 발행한 내 글을 보고 좌절한다.
그렇다는 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코딱지만큼 보는 눈이 생겼다는 결론이 난다.
그럼에도 이 좌절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또 좌절한다.
의식 수준의 큰 도약에는 항상 '나는 안다'는 환상의 내맡김이 선행한다. 사람이 변화하려는 자발성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종종 '바닥을 치는' 것, 즉 어떤 행동의 동선을 헛된 신념체계가 무너져 내리는 그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닫힌 상자에는 빛이 들어가지 못한다. 파국이 갖는 긍정적인 면은 앎의 높은 수준을 향한 파열일 수 있다.
만일 삶을 스승으로 바라본다면, 삶은 그런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겸손해지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교훈을 성장과 발달에 이르는 통로로 바꿔내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이 다룬 그런 교훈은 낭비된다.
p. 271-272
- 의식혁명, 데이비드 호킨스, 판미동.
아마 요즘의 나를 가족들이 본다면 살짝 미쳤다고 할 수도 있다. 글에 그림에 인문학에 진심인 엄마가 좀 낯설 테니까.
그나저나 나는 이 좌절에 바닥을 치고 다시 떠오르고 싶다.
더 겸손해져야 하는 명제를 받은 기분이다.
글 앞에서.
삶 앞에서.
교훈 앞에서.
관계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