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칠 때는 놓쳐야 할 이유가 있겠지

by 캐리소

아이에게 잔소리할 기회를 놓쳤다.


운동하고 늦은 점심으로 떡볶이, 순대, 튀김을 사서 집으로 갔다. 개교기념일이라 등교를 하지 않은 아들은 짐작대로 게임에 빠져 있어서 떡튀순을 함께 먹을 수 없었다. 내 몫의 식사를 후 잘 포장해서 식탁 위에 두고 난 내방으로 가서 이것저것 글도 쓰고 책도 읽다가 한 시간 만에 주방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느새 남편이 와서 저녁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에게 언제 왔는지, 왔으면 기척이라도 해야지 몰래 소리도 안 내고 이렇게 놀라게 하면 어쩌느냐고 했다. 그는 내가 방문을 닫고 조용하길래 줌 수업을 듣고 있든지, 아니면 잠이 들었겠거니 생각했다고 한다.


곧바로 아들이 배고픈 얼굴로 나오더니 자기 몫의 떡튀순이 어딨느냐고 묻는다.

그러게 어딨을까,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남편의 뒤통수에 난처함이 흐른다. (남의 것을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재활용 쓰레기함에 깨끗이 비워진 떡튀순의 흔적이 다.


아빠가 먹은 걸 확인한 아들은 짜증 섞인 말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배고프면 스멀스멀 화가 솟구치는 아들의 습관을 아는지라 마음 넓은 엄마처럼 스파게티를 만든다. 속으로는 온갖 욕을 차곡차곡 쟁여두면서. 아들에게 수북하게 한 접시를 내주고 나머지는 아빠 몫으로 식탁에 놓는다.


그것도 다 먹어치운 아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내 눈치를 본다. 엄마는 배고프다고 누르기만 하면 음식이 나오는 리모컨이 아니라고 했다. 이미 엄마가 해야 할 것은 다 했으니 그다음은 네가 챙겨 먹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녀석 봐라!

다짜고짜 내 옆에 있던 텔레비전 리모컨을 빼앗아 엄마도 텔레비전 보지 말라며 꺼버린다. (텔레비전은 아빠가 켰거든!)

자기도 화가 났다는 걸 내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뭐 하는 짓이냐며 한판 뜰 텐데 대거리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날부터 난 엄마보이콧에 돌입했다. 밥을 먹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고 내 볼 일을 보았으며 집에 돌아가서는 바로 씻고 내 할 일을 하다가 잠을 잤다.

그다음 날 다시 정색하고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냥 좀 더 둬보기로 했다. 저도 불편해봐야 안다. 엄마도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났다는 걸 단호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바로 훈육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텀이 생겼다면 서로 떨어져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동안은 그런 틈 없이 바로 의논하고 협상하고 해결을 보았다. (그게 해결이었나 생각해 보니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놓칠 때는 놓쳐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들이밀고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 꼭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니까.


이틀쯤 지나서 아들이 슬금슬금 나를 의식하는 것이 보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눈을 마주치고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엄마가 지난번에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났는지, 어떤 일은 네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화난 것은 알겠지만 너의 태도는 원만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그러는 동안 아들은 자기도 엄마의 마음을 알았으며 앞으로는 좀 달라져 보겠다고 했다... 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그냥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다.

그래,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지 않은 게 어디냐?

감사할 따름이다.


틈이 생긴 며칠 동안 난 내 시간을 가졌고 아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았으니 - 느낌으로 -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여유로운 놓침이었다.


이 일을 복기해 보며 아들보다는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견디는 힘,


전에는 맘에 담아 묵히고 기다리는 일을 좀처럼 하지 못했다.

성마르고 조급한 심정으로 무엇이든 내 앞으로 끌어당겨 해결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젠 꽉 틀어쥔 손에 힘을 풀고 조금씩 내려놓게 된다.

이게 나이가 주는 유익인 것 같다.


내가 모든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

나는 변방의 배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나는 완전함 속에 있으며 그건 핵으로서의 고유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작은 사건 안에서 내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게 놓치면서 놓치는 행간의 이야기를 주워 내 마음 안에 심는 것,

그것이 진짜 놓치지 않는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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