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에 대해서.
거북이의 성별은 모래의 온도로 결정된다. 요즘 수컷의 개체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유는 모래의 온도가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수컷이 태어날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 아닌가.
자연은 위기까지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또 다른 생존에의 모색에 나선다.
자연은 자신의 유전자지도에 촘촘한 원리를 새겨놓고 그 원리대로 따라간다.
자연은 독점과 예외를 미워한다. 큰 바다의 고도가 높이 쳐올린 절정으로부터 급속히 평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과 같이, 모든 세태의 변천도 스스로 평형을 되찾고자 한다.
- 자기신뢰 철학/랄프 왈도 에머슨
책을 읽을 때면 양극성을 보여주는 자연의 원리가 너무나 오묘해서 자연스럽게 수긍이 된다.
지혜가 있으면 반드시 어리석음이 따라오고 잃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측면으로는 얻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다면 잃음이 있다는 사실은 일견 자연의 공정한 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세계의 한 끝이며 시작인 우주를 품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건 절대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허락된 일들을 물속에 던져 그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
땀 흘리며 만들고 쌓아야 할 곳에 쌓기도 한다. 그 쌓음이 다른 곳에서는 쓰임이 있기 때문에 쌓는 행위도 자연스러움에 맡긴다.
에머슨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자기신뢰 철학'에서 '시골생활'을 말하는 문단에는 그의 지빠귀 같은 노랫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것 같다.
아마 소로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아홉 장 남짓 속에 깃든 '시골 생활'엔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그를 이끌고 매혹함으로 그를 사로잡은 자연의 아우라와 거기에 몸을 맡기는 철학자를 만날 수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만족하며 들에 누운 가축들도 사색에 잠기는 대지.
이 조화로움과 열린 풍경 속에서 에머슨은 자연을 영웅처럼 느낀다.
자연을 삶으로 받아들인 기억이 초라한 나로서는 그의 웅장함의 노래가 바다에 몸을 맡긴 거북이처럼 피부에 닿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면서 근근이 생명임을 얼핏 자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똑바로 서서 타락한 인간에게 신성한 감정의 유무를 탐지해 주는 온도계로서 봉사한다.
우리가 보기에 자연은 자신의 법칙을 위배하는 듯 보일 때조차도 언제나 일관된다. 또 자신의 법칙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도 현재는 기존의 패턴을 벗어난 기로에 서있다. 예민한 아이들은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으로의 길에 일관된 중심으로 나의 법칙을 지켜내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쳐놓은 과거의 견고한 허들을 넘을 준비를 마쳤다.
그 일을 마친다면 나도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내가 서있을 곳으로 기쁘게 가게 될 것이다.
자연의 비밀은 다 알 수 없다.
자연을 조성한 조물주만이 새로 배치하고 연출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연과 대치하거나 맞서지 않으려고 결정한다면 그의 영혼이 우리 속에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중력과 화학력을 넘어선 생명력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말처럼 가을 한낮의 숭고한 교훈을 맘껏 들이마시기를 고대하면서 한 줄 한 줄을 읽어나갈 뿐이다.
그저 나도 나의 귀의에 대하여 무한히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