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읽은 책들 중,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밑바닥에 웅크린 감정과 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아주 부드럽게 풀고 있는 책을 만난다.
그냥 일기에나 적어놓고 홀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야 할 정도로 일반적이지 않은 서적이지만 내 내면의 흔적을 따라가며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남겨둔다.
내가 얼마나 자주 죄를 짓고 좌절하고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용서의 기법을 연습하면 용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진실로 비난받아서는 안된다고. (일요일에 읽은 도덕감정론에서는 '정당한 비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용서의 기법'은 그것보다 몇 수 위의 개념처럼 보인다)
그들은 일정한 의식 상태에 있는 것뿐이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를 용서하라고.
상태는 그저 현상일 뿐이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는 아니라고.
이 문장에 공감!
나는 현상과 상태가 그 사람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현상과 상태가 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도 존재에 비하면 많이 제한적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용서하려면,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 내가 얼마나 견고한 인식에 갇혀있고 그것에서 깨져야 할지... 잠시 두렵기도 하지만,
가늠하지 않으련다!
그게 옳다면 옳은 방향으로 나가는 거다.
누군가에 대한 내 마음태도를 바꾼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든 나는 그를 내 마음 안에서 선하게 완성할 수 있다. 그가 원하는 모습의 그를 내가 상상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권위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용서받았기 때문에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에게, 혹은 인간에게 용서받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은 상태를 나타내는 매개체이며 그건 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는 아닌 것이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회개와는 다른 회개가 있었다.
회개를 새롭게 풀었다. 좁은 내 식견으로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회개는 내 감각기관이 인지하고 있는 것을 변화시켜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존재들을 새롭게 만드는 것을 통해 내 마음상태를 바꾼다면 그것이 회개다.
오늘 내가 배운 코칭의 마음가짐, 피코치의 우주성과 충만함, 그것을 아는 내가 그것을 모르는 피코치에게 알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온전한 회개와 사랑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