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표층에 사는 동물 중 모여사는 종들은 꽤 여럿 있다. 모여사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자연선택된 형질이다. 호모 사피엔스도 피해 갈 수 없다. 사회화되지 않았으면 가장 약한 피식자 중의 한 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갯과 동물처럼 잘 달리거나 턱 악력이 세지도 않고 고양잇과 동물처럼 밤눈이 좋은 것도 아니다. 덩치가 커서 다른 동물에 겁을 줄 수 있는 호기도 없으며 그렇다고 땅굴을 잘 파서 숨을 줄 아는 재주도 없다. 맨몸으로 다이다이로 붙으면 호모사피엔스가 이길 수 있는 동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생물군중에서 힘의 세기로 줄을 세운다면 피식자들 중에서는 상위권에 속하겠지만 포식자들 바로 밑에서 빌빌 기고 벌벌 떠는 피식자일 뿐이다.
인간의 약한 형질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모여 살 수밖에 없음을 체득했다.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니 약한 힘이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상호보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지혜다. 이 상호보완을 사회화라 한다.
사회화(社會化 ; socialization)는 "인간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 등을 배워서 그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곧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이 사회화 과정은 반드시 학습을 통해 전수된다. 그래서 이 과정은 가정교육을 통해 더불어 생존하는 기술을 배우고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시민으로서 지켜야 하는 공통된 가치와 규범을 체계적으로 익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인식하고 더불어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을 알게 된다.
이 더불어 잘 살기 위한 사회화 과정 교육이 잘 갖춰져 있는 사회를 선진국이라 한다.
하지만 사회화 과정은 너무도 다변적이고 복합적인 무한대의 확률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정답이 없이 상황에 맞게 흘러갈 수 있다는 거다. 그 상황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정의 내리고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해법이 되고 정답이 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사회화는 그만큼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다. 아니 영원히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과정일 수 있다. 정답을 맞혀가는 과정이고 좁혀가는 여정일 뿐이다.
각각의 경험과 공부의 양과 질의 차이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눈높이가 다르기에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한다. 똑같은 사물을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눈앞에 놓인 사물은 대상이니 변하지 않는 것일 테니, 그것을 해석하고 정의 내리는 인식의 존재 문제일 것이 틀림없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큰 의견차이가 없다. 그러다 점점 바라보는 대상을 가까이 가서 보게 되면 점점 다른 관점의 의견이 나오고 논쟁이 발생한다. 멀리서 봤을 때는 숲의 형상만 보여서 숲이라는데 공통인식을 하는데, 다가가 나무를 보니 삼나무가 보이고 소나무가 보이고 바오바브나무도 보이고 나무 밑에 야생화들도 지천으로 보인다. 하지만 각자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말한다. 여기는 삼나무 숲이라고, 아니 소나무 숲이라고.
"너 소나무 봤어?" "너 바오바브나무 봤어?" "보지도 못했으면서 얻다 대고 사과나무래? 눈이 삐었구먼"
그때부터는 내가 본 것만이 진실이 된다. 왜? 내가 틀림없이 봤으니까?
내가 봤으니 다른 것은 다 거짓이고 속임수가 된다.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본 것 외에 다른 것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의 범위에서 내가 경험했고 봐온 테두리 안에서 해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보거나 경험한 것은 철석같이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확증편향에 갇히는 전형적인 흐름이다.
사회화는 바로 다른 것을 인정하도록 학습하는 과정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경험한 것은 극히 아주 일부분이고 더 다양하고 더 복합적인 구조속에서 겨우 하나를 본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다양함을 알고 인정해야 그때서야 더불어 살 수 있는 기초를 갖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을 확장해,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파쇼 전체주의로 몰고 가는 선동적인 행동은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자기들만의 리그를 위해 나와바리를 조이고 틀어쥐는 행태 또한 경계해야 한다. 자기들만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제로섬 게임처럼 한쪽이 커지면 한쪽이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시선의 높이를 긍정과 공정으로, 영점 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공평에 양심이 더해져야 공정이 된다"는 최재천 교수의 촌철살인이, 세상을 바르게 보는 시선으로 작동할 때 더불어 사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