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00일간의 기록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단지 구전이나 기록으로만 남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 바람이 시작이었고, 100일 동안 나는 제주에서 그 바람을 붙잡기 위한 여정을 걸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서귀포', '이중섭 거리',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이 있었다.
사업을 구상하다 보면,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넣고 싶고, 그러다 보면 애초에 작고 명확했던 아이디어는 점점 덩치를 불려가며 애매해진다. 나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중 단 하나로도 고객을 설득할 수 있는가?” 내가 주목한 시장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고객조차 인지하지 못한, 아주 작은 틈새였다. 하지만 그 틈은 확실했고, 현실적이었다. 이것이 나의 니치마켓이다. 고객의 숨겨진 니즈를 발견하고, 작게 실험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과정. 야금야금,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오늘은 조카의 100일 잔치가 있어 당일치기로 서울에 다녀왔다. 새벽 비행기로 출발해 밤 늦게 돌아오는 강행군. 몸은 피곤했지만, 조카의 귀여움은 모든 피로를 상쇄시켰다. 이동 중인 비행기 안에서는 인터넷이 되지 않아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강제 집중’의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보너스처럼 느껴졌다. 사업계획서를 다듬고, 지금까지의 흐름을 되짚는 데 아주 유용한 시간이었다. 멀리 움직이며 머릿속도 맑아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 오늘은 조카 덕분에, 그리고 하늘 위 덕분에 큰 수확을 얻었다.
오늘은 오래 기다렸던 만남이 있었다. 음악적 감각을 가진 창작자와 나눈 대화는 아주 깊고 재미있었다. 예술과 기술이 만날 때 생기는 시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또, 기다리던 틈에 이중섭 거리 해설가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이 거리와 공간의 이야기를 직접 살아낸 분의 말을 듣는 건 너무나도 귀한 경험이다. 내일은 이중섭 거주지 맞은편에 어릴 적부터 살았던 주민을 만나러 간다. 나는 결국 이 땅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람들이 텍스트가 아닌 콘텐츠로,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이야기 말이다. 기술은 도구일 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설명회 꼭 들어야 하나? 반신반의하며 클릭한 줌 링크.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유익했다. 사업의 방향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만들어주는 팁들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담당자 분들의 설명이 너무 친절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도 막힘 없이 답변해 주시는 모습에 ‘아, 이 분들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서귀포에서 자라나는 나의 작은 아이디어가 예비창업패키지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오늘은 사업이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
이중섭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다룬다면,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이중섭에 대한 진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서귀포에서 이중섭을 가장 잘 아는 분'을 찾아뵈었다. 나의 아이디어와 콘텐츠 구조를 설명 드렸고, 돌아온 조언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역시, 현장에 있는 목소리는 다르다. 기술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콘텐츠가 되어야 한다는 당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오늘의 만남은 하나의 큰 축이 되어 앞으로의 콘텐츠에 영향을 줄 것이다.
서류 작업의 날. 신창사 가점 서류를 준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의 흔적을 되짚으며 정리하니 뭔가 뭉클했다. 그동안 내가 돌아다닌 서귀포의 거리들, 만났던 사람들, 기록했던 모든 것들이 글 속에 스며 있었다. 물론, 진심만으로 되는 게 사업은 아니다. 하지만 진심이 없으면 시작조차 못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진실성을 '기본값'으로 두고 싶다. 고객에게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심사위원에게도. 서류는 다듬을수록 탄탄해진다. 나 역시 그렇게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디자인 팀원과 함께 작업했다. 콘텐츠는 같지만,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순간 그 전달력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게'가 아니라, '명확하게' 만드는 도구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시각이 주는 정보량은 어마어마하다. 같은 자료라도 디자인의 힘이 더해지면 보는 사람의 이해도, 몰입도 모두 달라진다. 팀으로 일한다는 것, 서로의 전문성이 만나 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 이 과정이 너무 즐겁고 감사했다.
AR 콘텐츠에 기능을 이것저것 넣다 보니, 결국 먹통이 되었다. 작고 귀여운 나의 AR 콘텐츠가 속절없이 멈춘 화면을 보며 허탈했지만,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본다. 결국, 기술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라는 걸 다시 체감한다. 처음에는 단순했던 구조가 점점 복잡해지고, 어느 순간 터질 듯 팽창해버린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정리'.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마치 마음을 비우고 다시 걷는 기분이다.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는데, 하필이면 광화문을 지나게 되었다. 집회가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겨우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아늑한 서귀포가 그리운 하루였다. 도시는 언제나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제주라는 공간에서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은 팝업스토어에서 증강현실 콘텐츠를 시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봤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갤럭시폰에서는 QR로 링크 타고 들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피드백. 그리고 UI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직접 보여주고, 설명을 들으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용자 경험의 허점들이 보였다. 역시, 실사용 피드백은 귀하다. 오늘 얻은 인사이트들을 반영해, 더 나은 버전으로 개선해갈 것이다.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었다. 어떤 날은 좌절했고, 어떤 날은 크게 기뻤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버티는 장면이 떠올랐다. 왜 100일이었을까? 그건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나는 임계점이었기 때문 아닐까. 나도 그렇다. 처음엔 막연했던 아이디어가 이제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100일 동안 매일 기록을 남기면서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나 자신도 더 단단해졌다.
이제, 나는 101일차로 간다. 다시 처음처럼. 그러나 더 단단하게.
"이중섭 거리에서 증강현실 만들고 있어요." 이 말 한마디에 이제는 사람들이 “아, 그 스레드요?”라고 대답해준다. 브런치, SNS, 오프라인에서 마주한 모든 반응은 나에게 말한다. “당신의 100일은 분명히 어떤 결을 남겼어요.”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야금야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천천히, 하지만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