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진짜 공직자를 찾아서
그는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장의 가장 높은 곳은 언제나 영웅들의 위인전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는 특히 스스로를 희생하여 나라를 구한 순국선열, 애국지사들을 동경하였다.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고 동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 폐허가 된 땅에서,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 선진국으로 우뚝 일어선 것으로,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한 거 같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몸소 일궈낸 지도자들, 과학자들, 기업인들, 노동자들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머리가 커지고 자의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뭔가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게 될 때쯤엔, 대한민국은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 같은 하드파워뿐만이 아니라, 영화, 음악, 미술, 공연, 음식 같은 소프트파워까지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선 강하고도 멋진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과 행정학을 복수 전공했고, 부전공으로 경제학을 공부했다. 4학년 때 시험에 합격했고,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그는 꿈에 그리던 중앙행정기관의 공직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순국선열, 애국지사 같은 영웅들의 뜻을 잇는다는 뜨거움으로 늘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면서, ‘어?’, ‘뭐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들이 찾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도수가 늘었고 강도가 세졌다. 공직자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마음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감춰두어야 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걸 드러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3년을 보낸 후에 결론 내린,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공직자는 적당히 자기 일 하면서(하는 척?), 선후배, 동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고, 승진, 성과급, 표창 같은 것들을 손해 안 보고 눈치껏 잘 챙기는 유형이었다(이게 가능한 이유는, 정부가 하는 일은 성과 측정이 안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가면,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심지어 남이 떠넘긴 일까지 처리하고, 승진, 성과급, 표창 같은 것들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는 유형이 있다. 반대로 일은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상사들 비위나 맞추면서 때마다 승진, 성과급, 표창 같은 것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유형이 있다. 대부분은 그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정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권력자와 여당과 야당, 그리고 거기에 선을 대고 있는 장관, 차관, 국장, 과장들을 위한 것이다(인사권이라는 목줄로 줄줄이 꿰인 먹이사슬 피라미드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요구에 따라 행정을 하는 과정에서 요행 국가와 국민을 위한 효과가 부수적으로 나오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물론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거창하게 포장하고 또 홍보한다. 그런 속임수를 들키지 않게 감쪽같이 처리하는 이들이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고 요직을 꿰찬다.
그는 처음에는 버텼다. 오랜 꿈과 다짐,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배척되고 낙후되고 배제되는 자신을 바라보며 자괴감, 무력감, 허탈감이 찾아왔다. 분명 내가 옳지만, 첫째, 내가 조직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결코 이길 수 없다. 조직은 나를 치우고 조직이 원하는 자를 배치할 것이다. 둘째, 내가 부서지더라도 싸우는 것이, 어떤 의미라도 있을까. 없다.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셋째, 내가 옳지만, 조직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조직과 타협하면서 어떤 합리적인 대안을 찾을 수는 없을까.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중심을 포기하지 않되 드러내지는 말고 나에게 주어진 권한 내에서 최대한 그 중심에 다가가려고 노력하자.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내려야 할 의사결정의 중요도가 높아질수록(국가와 국민의 관점이 아닌 권력과 거기에 선을 댄 이들의 관점에서), 점차 타협도 불가능해졌다. 이대로 과장이 되고, 국장이 된다면. 체념으로, 순응으로, 동화로 갔다가, 어느새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가는 선배 과장, 국장들이 그 증거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과장, 국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을 할 수 없는 곳, 때로는 국가와 국민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곳은 더 이상 공직이 아니었다. 공직을 그만 둘 결심을 굳히고, 마지막으로 정부조직도를 펼쳤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기관, 그리고 거기에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는 아랫줄의 기관들, 또 그 아랫줄의 기관들.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의 흐름은 보이는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공직이 아니었다. 떠나야 한다는 결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때 정부조직도의 맨 마지막 줄, 맨 끝에 자리한 기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국에서 밀려드는 행정민원들을 처리하는 기관이었다. 중앙행정기관 중에서 유일하게 국민들을 직접 대면하는 기관이다. 국민들의 어려움과 억울함을 듣고, 현장에 찾아가고, 그리고 해결해 주는 기관이다. 그런데 정부 내에서는 온갖 무시와 조롱을 당하는 기관이다. ‘저런 게 무슨 중앙행정기관이냐.’ ‘민원처리는 주민센터나 하는 일 아니냐.’ ‘거기 쓰레기 처리하는 데 아니냐.’
그는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국민이 있는 곳, 국가가 진짜 해야 할 일이 있는 곳으로. ‘엘리트 관료’, ‘정부 고위관계자’와 같은 한 때 동경했으나 가짜로 확인된 허상을 내려놓고 진짜를 찾아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바른 생각을 가진 공직자들이 더 이상 자괴감, 무력감, 허탈감을 느끼며 떠나는 일이 없도록, 입직 때 가졌던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자부심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그런 정부를 만들겠다. 그런 공직자들이 ‘엘리트 관료’, ‘정부 고위관계자’가 되게 하겠다. 또한 정부조직도를 거꾸로 뒤집어서 국민을 직접 대면하는 민원행정이 정부 내에서 제일 중요한 업무가 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