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수호하라고 쥐어준 힘으로 헌법을 무너뜨리는
헌법은 국가 통치의 기본원리, 국민 기본권 보장 등을 담고 있는 근본법이자 최고 법규다. 또한, 헌법기관은 헌법에 의해 설치되어 독자적 지위와 권한을 갖는,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기관이다.
여기 한 헌법기관이 있다. 국가 통치의 근간을 떠받치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책임지는 업무를 담당한다. 그 업무는 국가와 국민에게 핵심적이고 필수적이기에, 어떤 정파적 영향을 받을 이유도 없고 받아서도 안 되며, 외부의 그 어떤 간섭도 받으면 안 된다. 즉 정치적 중립과 직무상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헌법기관으로서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처럼, 견제와 균형은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다.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은 강할수록 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훼손한다. 그래서 헌법은 그 헌법기관의 최고의결기구를 합의제로 설계하였다. 모든 외부기관을 견제하기 위해 어떤 외부기관의 견제도 받지 않는 권력이, 분산되었다가 다시 합의되는 내적 통제를 반드시 거치도록 위원회라는 묘수를 둔 것이다.
헌법은 7명의 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중에서 1명이 위원장을 맡지만, 반드시 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토록 하였다. 특히 다른 직무상 독립기관들과 달리 소관사무 통할권 및 내부규율 제정권을 위원장이 아닌 위원에게 부여함으로써, 위원회가 무소불위한 권력의 행사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하고, 이를 통해 헌법가치를 수호해야 함을 확고히 하였다.
그런데 만약, 아주 만약에 그 위원회가 무력화된다면, 무력화되다 못해 파괴되고 유린된다면, 그래서 그 헌법기관이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직무상 특정 세력에게 휘둘리면 어떻게 되는가. 국가 통치의 근간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 헌법 수호는 또 어떻게 되는가. 모름지기 견제란 외부에서 중첩되어 작동할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 상호 교차 견제하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기관을 감시하고 감독할 수 있는 무소불위한 권력에 대해, 그 견제를 내부에 맡긴 것은 패착이었다.
그 헌법기관의 법률에 이런 규정이 있다. ‘위원장의 지휘·감독 하에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사무처를 둔다.’ 그리고 어느 날, 사무처의 장이 새로 임명됐다. 전 정권에서 헌법가치를 훼손하며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다 좌천당했던 인사가 현 정권 출범과 함께 사무처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외부에는 정권차원의 비호가 있고 내부에는 절대적 팬덤을 가진 그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실세 사무처장으로 불렸다. 사무처의 주요 포지션들이 그의 라인으로 연결됐고 일사분란하게 정렬했다. 그는 핍박했던 전 정권에 복수하고 중용해 준 현 정권에 충성할 일도양단의 찬스를 잡았다.
사무처장은 전 정권 인사들과 정책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의 행보엔 거칠 것이 없었다. 방해되는 규정은 없애버렸고 필요한 규정은 새로 만들었으며, 미처 체크 못한 규정이 문제 되면, 잘못된 규정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사무처를 지휘·감독해야 했던 위원장은 위원회의 의결에 따른 행정사무를 처리할 뿐인 사무처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자신이 대표해야 할 위원회의 의결권을 무력화하는 전결권을 행사했다.
위원회는 사무처장의 독주를 막아섰다. 헌법기관의 정치적 중립과 직무상 독립을 지켜 헌법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한 위원이 앞장섰고, 현 정권에서 임명된 위원들까지 뜻을 모아 사무처장이 정권에 바칠 진상품으로 추진하던 정책을 부결시켰다. 그러자 사무처장은 결재는 위원회가 아닌 사무처가 한다고 천명하고, 위원회의 결재 절차를 건너뛰도록 전산시스템을 뜯어고쳐버렸으며, 부결에 앞장섰던 위원을 감찰하고 수사의뢰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위원장은 사무처장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결국 내적으로는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위원장이 헌법기관 자체이자, 그 헌법기관이 수호해야 할 헌법가치이기도 한 위원회를 파괴하고 유린했으며, 외적으로는 헌법 수호를 명분으로 독자적 지위와 권한을 받은 헌법기관이 그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헌법을 무너뜨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
공직생활의 전부를 그 헌법기관에서 보낸 위원장은 주요 직위를 섭렵하고 재임 중 석사·박사 학위를 받는 등 조직이 줄 수 있는 수혜의 최대치를 누렸으며, 조직의 기대 속에 최초의 내부 승진 위원장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으나, 결국 조직을 최대치로 망가뜨린 최초의 위원장이 되고 말았다.
한편 위원장은 휴일에 직원들을 사적으로 동원하고 공용차량을 유용하였으며, 국민 세금으로 관사를 호화롭게 치장했다는 의혹과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그 헌법기관의 견제를 받는 그 어떤 말단 기관의 최하위직 공직자도 하지 않는 행위다. 그야말로 견제받지 않는 권력만이 향유하는 부패에 대한 무감각의 전형이다.
사무처장, 위원장만이 아니다. 직원들은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조사 대상 기관을 압박하고 협박해서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다. 출퇴근시간을 지키지 않고 출장을 가지도 않았으면서 간 것처럼 일지를 조작했다. 법인 카드를 사적으로 유용하고 거짓 증빙으로 예산을 지급받았다. 부패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적발되거나 시정된 적 없고,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내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제일 깨끗한 기관인 것처럼.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그 어떤 외부의 견제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내부 통제까지 무너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기관들에게는 헌법을 빙자하여 추상같이 칼을 휘두른다.
그 헌법기관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권력이 클수록 더 심하게 부패하며, 내부 통제는 무기력하고 무소용하다는 진리를 스스로 드러냈다. 그리고 수호를 맡긴 헌법의 무게와 가치를 가늠할 수 없고, 국가와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그런 헌법기관의 부패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스스로 입증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헌법기관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외부 통제 장치를 마련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