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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과 피지배층

대리인과 주권자

by THE RISING SUN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고귀한 가치, 궁극적 목표를 애국이라 하자. 그 안에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 공정, 청렴 등이 포함된다. 애국에 반하는 행위를 부패라 하자. 그리고 애국인지 부패인지를 가르는, 실체가 드러나는 결정적 순간을 전쟁이라 하자. 전쟁에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모든 상황이 포함된다. 지배층은 애국을 전제로 피지배층으로부터 지위를 인정받고, 권력을 넘겨받는다. 지위를 누리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이 모든 게 애국이라고 공표한다. 그리고 피지배층에게도 애국을 독려한다.


먼저, 피지배층이 왜 애국을 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왜 생명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애국을 하는가. 애국은 인간이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고귀한 가치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인간에게만 도덕률이 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한다. 그건 이성의 영역인데, 학계에서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 공동체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필요한 원칙과 기준을 만들었고, 그것들에 대한 교육, 학습, 경험이 오랜 세월 지속되고 누적되면서 도덕률로 내재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생명체인 인간이, 생명체의 본질인 생존과 번식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생명을 내려놓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애국을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럼 지배층은 왜 애국하지 않고, 부패하기까지 하는가.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 일어나면, 피지배층을 최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보내고 지배층은 후방으로 몸을 뺀다. 그러면서 애국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피지배층은 지배층이 그러거나 말거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지배층이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 최전선으로 나아간다. 지배층이 이처럼 피지배층에 희생을 전가하고 강요하는 심리,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먼저 엘리트 이론(Elite Theory)이다. 사회는 소수의 권력층인 엘리트와 다수의 피지배층인 대중으로 나뉘는데,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쥔 엘리트들은 상호 결탁하여 국민들을 조작하는데, 그중 하나가 애국심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조작이다.


다음은 헤게모니 이론(Hegemony Theory)이다. 권력층은 단순한 물리적 강압이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 동의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한다. 애국심, 국가 이익, 도덕적 의무 같은 개념을 통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희생하도록 만드는 구조를 형성한다. 또한 교육, 언론, 종교 등을 활용해 지배층의 이익이 마치 사회 전체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한다. 특히 앞서 언급한 개인의 희생이 필요한 전쟁, 경제위기 등의 상황에서 이런 헤게모니가 강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대중은 그것을 국가 전체를 위한 것으로 인식할 뿐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은 사회계약론의 왜곡(Distortion of Social Contract Theory) 현상이다. 전통적인 사회계약론에서는 국민이 국가에 권력을 위임하는 대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원칙이 왜곡되어 지배층이 국가를, 국민을 보호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전쟁, 경제위기, 질서 유지 등을 명분으로 애국심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지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보다,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민족주의(Nationalism)에 대한 비판이다. 민족주의는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전쟁처럼 국민의 희생이 필요할 때마다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강조된다. 평상시에는 계층 갈등이 존재하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피지배층의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계층 구조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희생한 사람들의 몫은 보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심리학적 이론이다. 인간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소수인 지배층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수인 피지배층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이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전략으로, 더 많은 자원을 독점할수록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심리학적으로는, 지배층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현 체제의 유지를 정당화하고 피지배층은 안정감을 느낀다는 시스템정당화 이론(System Justification Theory)도 있다.


전쟁이라는 결정적 순간에 이렇게 애국과 부패로 갈리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동체를 대표하는 지위와 권한을 넘겨받아 누리고 행사하는 지배층은 애국에 앞장서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것이 도덕률에 부합하고, 상식에도 맞는다. 심지어 자신들도 입으로는 애국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도대체 지배층의 실체는 뭘까. 어떻게 해야 이 이상한 상황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사실 공화정의 시대에, 국민이 주권자인 대의민주주의의 나라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표현은 틀렸다. 주권자와 대리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명목이고 실질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리인들은 입만 열면 자신들은 공복이고, 오직 국민을 섬길 뿐이라고 말하지만, 주권자로부터 지위와 권한을 넘겨받는 선거라는 의식을 행할 때 잠깐 허리를 숙이면 그뿐이다. 이제는 지배층 노릇하는 가짜 말고 제대로 된 진짜 대리인을 갖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그들이 지배층에 진입할 당시의 심리를 살펴보자.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마음이 이기심으로 가득 찬 자들이, 애국자 시늉을 하면서 피지배층을 속이고 지배층의 지위와 권력을 차지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애국하는 마음으로 지배층이 됐는데, 지위와 권력을 누리면서 내면에 억눌렸던 이기심이 발현되는 경우다. 물론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진짜 대리인을 뽑으려면, 첫째, 대리인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가진 이들만 정치에 진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리인의 자리를 지배층의 자리로 여기는 자들, 특권의식을 가진 자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판단을 내릴 역량이 없는 자들은 걸러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검증 시스템은 부실하다 못해 구멍이 숭숭 뚫린 수준이다. 학력, 경력, 재산과 같은 항목으로 전문성, 청렴성 등을 검증하고, 저서, 인터뷰, SNS, 연설 등을 통해 공개된 철학, 소신 같은 것들을 검증한다. 심지어 인상적인 말 몇 마디로 지지를 얻는 경우도 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검증 시스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주권자들이 기만당하기 쉬운 구조다.


실질적 검증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되려는 자는 광역자치단체장을 경험한 자로 한정해야 한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뉴욕주지사를 지내며 대공황에 대처하는 정책 능력을 검증받았고, 인도의 14대 총리 모디는 구자라트 주 총리를 지내며 농업 성장률 평균 10%, 경제 성장률 평균 10%까지 끌어올려 역시 정책 능력을 검증받았다. 그들이 얼마나 성공적인, 그리고 모범적인 국가 지도자가 됐는지는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또한 총리가 되려는 자는 장관을 경험해야 하고, 국회의원이 되려는 자는 광역의원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재임기간의 공과를 철저히 기록해서 주권자들이 선거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음은 교육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조선시대 성균관도 아니고 무슨 교육기관이냐 할 수도 있지만, 사관학교, 경찰학교, 각종 기술학교 등을 운영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맡길 정치 지도자와 공직자에 대한 교육기관이 없다는 건 난센스다. 프랑스는 그랑제콜이라는 국립 엘리트 고등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엔 파리정치대학, 파리국립행정학교 등이 포함된다. 파리정치대학의 경우 20여 명의 대통령과 총리를 배출했다.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 일본의 마쓰시다정경숙도 있다.


둘째, 대리인이 된 후에도 견제와 균형 속에서 활동하게 해야 한다. 지금처럼 일단 당선만 되면 아무렇게나 해도 임기를 채우는 구조는 안 된다. 대통령의 경우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너무 위험하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처럼 절대 권력을 30년간 행사하면서도 실패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나라를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건 요행을 바라는 일이다. 앞서 밝힌 허술한 시스템으로 검증한 지도자가 요행 훌륭한 인품을 가졌고, 요행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요행 그가 속한 정당이 다수당이 되어 정책 추진 동력을 얻게 됐을 때 가능한 일이다. 요행이 최소 3번 이상 겹쳐야 가능한 일을 막연히 기대할 게 아니라 1차 철저한 검증 시스템을 통과하게 하고, 2차 재임 기간 견제와 균형 시스템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먼저, 국회가 선출한 총리와 권한을 나누고 서로가 생산적으로 경쟁하는 구도를 만드는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다. 최소한 현재의 입법부와 행정부가 사사건건 대립하며 아무것도 되는 일은 없고, 온갖 정쟁으로 국력을 모두 소진해 버리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 다음은 아예 의원내각제다. 국회의원의 경우에도 현행 특권을 모두 회수하고, 국민소환제 등 견제 시스템을 활성화해야 한다.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서 아니라면 언제든 바로 내려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 외에도 각종 국가 권력의 행사가 철저한 견제와 균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면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셋째,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 지방의원 등 국가 권력을 넘겨받아 행사했던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 시스템을 운영해야 한다. 국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국가 예산을 흥청망청 낭비해 버리고는 고도의 통치행위였다, 불가피했다고 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이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 어떤 사후적 응징보다는, “선거에서 이겼으니 뭐든 내 맘대로 해도 되고 책임질 일도 없어.”가 아니라 공식적인 사후 평가를 인식해서 국가 권력과 예산을 사용함에 있어 최소한의 신중함 유지를 담보하자는 것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상반되는 심리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있었지만, 사실 그 작동 기제는 간단하다. 지배층은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향한 이기심이라는 본성에 충실한 상태에서 그것을 애국으로 포장하고 국민을 속이는데 이성을 활용한다. 반대로 피지배층은 살고 싶다는 본성을 억누르고 애국이라는 고귀한 가치로 극복하는데 이성을 활용한다. 무게의 중심이 지배층은 이기심, 본성에 있고, 피지배층은 이타심, 이성에 있다.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지배층이 이기심 충만한 본성에서 벗어나, 이타심 넘치는 이성적 존재가 되도록 돌려세워야 한다. 그런데 그건 요행으로는 안 된다. 시스템으로만 가능하다.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지배층이 되려는 자는 물론이고, 권력에 취해 초심을 잃는 자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권력이 인간의 심리를 움직여 판단력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 있고, 우리가 직접 목도하기까지 하였다. 이성에 기반한, 본성을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하게 설계된 시스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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