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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와 대하드라마

불 꺼진 극장에 비상구가 없다

by THE RISING SUN

‘블록버스터(Blockbuster)’는 단기간에 큰 흥행을 올리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 만든 대작 영화다. ‘대하(大河)드라마’는 내용의 전개 과정이나 길이가 길고 규모가 매우 큰 드라마다. 우리 국민들은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다. 연간 예산 약 70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가 매년 개봉하기 때문이다. 추경을 통해 수십조 원의 제작비가 추가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블록버스터는 동시에 대하드라마다. ‘대하’, 말 그대로 큰 강이다. 끊이지 않고 계속 흐르는, 끝이 없는 드라마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가 끝내준다. 성공과 사랑, 실패와 배신, 욕망, 복수, 치정 같은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을 찌르고 파헤쳐서 국민들의 공감과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서스펜스, 스펙터클 등 가능한 모든 형식의 스토리텔링을 롤러코스터처럼 고저와 강약을 오가게 만들어, 국민들은 한시도 눈을 뗄 수도 긴장을 놓을 수도 없다. 물론 눈물이 쏙 빠졌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웃음이 나오는 유머코드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촬영기법도 CG(컴퓨터그래픽), 3D(3차원입체), VFX(시각특수효과) 등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해서 국민들이 현실을 가상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초호화 캐스팅이다. 단독 주연이 가능한 스타들만 최소 수백 명이다. 덕분에 볼거리는 풍성한데 각자가 주연급으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푹 빠져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좀비처럼 막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 씬 스틸러(Scene Stealer) 조연들이 최소 수천 명이고, 단역들이 또한 최소 수만 명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심심할 틈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블록버스터의 장르가 재난영화라는 사실이다.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 대하드라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배를 타고 제일 예쁜 섬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우리 아이들 수백 명이 진도 앞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고, 서울 한복판 이태원에서 축제를 즐기던 수백 명이 죽고 다쳤다. 나라를 지키라고 해병대에 보낸, 열 번의 시험관 시술을 통해 얻은 삼대독자가 급류에 떠내려갔고, 그걸 조사하던 대령은 끌려갔다. 도시 한가운데 멀쩡한 지하차도에 들어간 시민들이 나오지 못했고, 착륙하던 여객기가 공항 담벼락에 충돌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시 참수작전에 투입되는 무장한 최정예 군인들과 아파치 헬기, 장갑차가 서울 여의도에 나타났다.


해외에 나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짓고, 세상에서 가장 긴 다리를 놓는다는 나라에서, 철근을 빼먹고 콘크리트에 물을 섞어, 짓던 아파트가 무너졌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놓던 다리가 쏟아졌다. 우리 전투기가 민가에 폭탄을 투하했고, 30억 원짜리 군용 무인기가 가만히 서있는 185억 원짜리 군용 헬기를 들이받아 전소됐다.


천억 원 이상을 투입한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K-POP의 나라에 엄청난 기대를 갖고 찾아온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추억을 선사하며 다시는 찾을 일이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국제적 망신을 당한 후 다시 몇 달 만에 수백억 원을 들여 부산 엑스포 유치를 추진했으나, 판세 분석에 실패한 유치 시도 자체가 헛발질이었던 것만 확인하고 끝났다. 그리고 동해 유전을 개발한다면서 또 수천억 원을 쏟아붓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동맹국으로 부르며 달라는 대로 줬더니 현금인출기라 부르며 더 내놓으라고 한다. 그렇게 눈치라고는 없는 전혀 민감하지 않은 국가가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열창한 대가로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 지정을 받아냈다. 수십조 원을 투자해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창출해 준 대가로 약속받은 보조금은 수령이 불투명해졌다. 우리 국민들을 끌어다 강제 노역을 시킨 나라가, 인권 유린의 현장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세탁하기 위해 온갖 양보와 협조를 다 받아낸 후 반성과 사과의 약속에 대해서는 입을 씻었는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 나라는 아직도 우리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손을 잡았던 나라에게는 뒤통수를 맞았고 등을 돌렸던 나라와는 더 멀어졌다.


안전 참사, 경제 참사, 외교 참사가 끊이질 않는데, 배우들은 분장하고 대사 외우고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가면 분장에,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극단적 인지 부조화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대사를 친다.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메서드 연기다. 원래 모든 블록버스터와 대하드라마는 권선징악이고 해피엔딩이다. 중간에 아무리 무시무시한 악당이 위력을 떨치고 유례없는 대참사가 일어나도 반드시 영웅은 등장한다. 악당을 징치하고 대참사를 막아서 결국은 지구의 평화를 지켜낸다.


그런데 문득 권선징악,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악당이 계속 설쳐대며 대참사가 지속될 수도 있다. 블록버스터는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쓰이던 폭탄이다.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을 폭격하는데 썼던 5톤짜리 폭탄이 한 구역(block)을 송두리째 날려버릴(bust)만큼 강력하다고 해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붙었다. 이게 영화가 아니고 폭탄이면 어쩌지. 폭탄이 끝나지 않는 대하드라마처럼 계속 터지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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