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기다리며
지도자는 시련을 당하고 극복한 경험을 가진 자여야 한다. 그가 이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이 곧 시련과 극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공동체를 이끌 때 수많은 시련에 맞닥뜨릴 것이고, 반드시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시련을 겪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래서 어떤 교훈을 얻고 가슴속에 어떤 뜻을 새겼는지, 그 경험의 종류가 중요하다. 주어진 권력을 원한을 풀고 복수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고, 세상에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만드는데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웅서사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전기적 유형을 띤다. 영웅은 일반 세계에서 평범한 삶을 살다가 소명을 받아 모험을 시작한다. 스승과 조력자를 만나 가이드를 받으며 시련들을 이겨내지만, 다시 죽음과도 같은 최대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결국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 영웅서사에 따르면 지도자는 개인에게 닥친 시련들을 이겨내면서 지혜와 역량을 축적하고, 그 힘으로 공동체를 덮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해 평화의 시대를 연다. 우리는 모두 영웅의 출현을 기다린다.
인류는 오랫동안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왔다. 공동체에는 모름지기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간 인류는 수많은 지도자들을 연구하고 분석해 왔다. 지도자가 공동체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도자론이 있다. 적어도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지도자들이 출현했다. 연구와 분석, 검증을 거쳐 어떤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정립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고, 차고 넘치는 케이스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 주변에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없을까. 인류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먼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첫째, “운은 대담한 자의 편이다.”역사는 운(포르투나)에 의해 결정되지만 군주는 자신의 능력(비르투)으로 포르투나를 통제하며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군주는 사자처럼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강한 군대를 가지지 않으면 국가는 오래 버틸 수 없으니 용병이나 동맹에 의존하지 말고 자국의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 둘째, “사람들은 사랑보다 두려움을 더 오래 기억한다.”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여야 하고, 잔인하되 불필요한 적을 만들어 증오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정치는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현실적 기술이므로 군주는 선해 보일 필요는 있지만 실제로는 냉혹해야 한다. 셋째,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군주는 단순히 도덕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며 필요할 경우 기만술도 써야 한다. 때로는 위선을 활용해야 하고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종교나 윤리도 이용해야 한다. 여우처럼 영리해서 상대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책략을 써야 한다.
다음은 유가(儒家)의 <대학>과 그 주석서인 <대학연의>다. 지도자는 인의(仁義)를 갖춘 군자(君子)가 되어야 하고, 성리학적 정치이념인 덕치, 예치, 의리 등을 실천하기 위해 수신제가하고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해야 한다.
법가(法家)의 <한비자>에 따르면 군주는 법(法), 술(術), 세(勢)를 이용해 절대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독점해야 하므로 군주는 절대 신하를 믿어서는 안 되고 도덕보다는 법과 권모술수가 중요하며, 백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법과 처벌이 필요하다. 같은 법가의 <상군서>에는 군자는 강력한 법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하고 농업과 국방을 중시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다음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첫째, 소명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을 가져야 하고, 둘째, 맹목적이어서는 안 되고 자신이 행사하는 권력과 그 현실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셋째, 냉철한 이성에 기반한 균형감각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만약 정치인에게 신념윤리만 있다면 목적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킬 수 있고, 책임윤리가 없다면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야기하며, 목측능력이 없으면 전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에서 이상국가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상적 지도자로 철인군주(哲人君主)를 제시했다. 지도자는 지혜와 덕을 갖춰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성을 갈고닦는 혹독한 훈련과 양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만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리인 이데아(idea)를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실재(實在)하는 세계다. 동굴의 벽을 향해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은 동굴 벽에 비추어진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실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 동굴 밖으로 나가면 밝은 세상을 보게 되고, 세상을 비추는 근원이 태양임을 알게 된다. 실재의 세계를 보고 인식한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여전히 동굴 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실재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가 바로 철인군주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