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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Sep 19. 2020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존중과 배려에 대한 고찰


  곧 추석이 다가온다. 삼십 년 전쯤 지금과 같은 택배 시스템이 미흡하던 시절, 설날이나 추석 명절 때면 양복을 벗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배달 지원을 나갈 때가 있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것보다는 배달 트럭의 기사 옆에 타고 명절을 앞둔 길거리 구경도 하고, 맛있는 기사식당을 찾아 함께 점심도 먹고 ‘삶, 체험의 현장’ 같은 재미가 있어서 좋았다.


 힘들게 선물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저층 아파트에 걸어 올라가서 배달을 마치고 돌아설 때 주스를 마시고 가라고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어린아이가 물고 빨던 흔적이 남은 헤진 플라스틱 머그컵에 달랑 주스를 따라 주는 집이 있었는데 마실 수도 없고 안 마실 수도 없는 난감한 경우가 있었다.


 바쁜 사람 차라리 그냥 보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름 배려는 고마웠지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집에서는 작은 쟁반이나 컵 받침대에 정중하게 유리 주스잔을 받들고 나와서 주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집에서는 벨소리가 울리니까 손님이 온 줄 알고 방에서 공부하던 아이가 “엄마, 누구야” 하면서 뛰어나오는데 배달하고 돌아서는 등 뒤에서 “ 들어가서 공부해!!!,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돼” 하는 집보단 나을 수도 있다. 그때는 택배 전문 회사가 없었고, 지금처럼 배달업이 직업으로서 자리 잡지 못했을 때였지만 이젠 코로나 시대와 함께 배달업은 새로운 산업군으로 빠르게 성장할 것이며 그들의 직업적 가치도 동반 상승할 것이다.


부안 적벽강

 언젠가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엇이든 직접 경험을 해보면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공감이 된다.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 팀장이 되면서부터는 업무상의 이유로는 저녁 술자리가 끝난 후 나는 귀가 시 회사와 계약된 대리운전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저녁은 강남 주변이라 집까지 먼 거리가 아니라서 만원 조금 넘게 회사가 지불하는 후불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에 도착하면 잊지 않고 헤어질 때 대리기사분께 꼭 식사하시라고 만원씩 드리는 습관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옛날보단 살림살이도 나아졌고, 또한 좋은 회사에서 대리운전 비용은 후불로 지급해주니 만원은 내가 사례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뜻밖의 사례를 받은 기사분은 가끔은 그런 행운도 있어야 일할 맛이 날 것이다.


 반드시 가정 형편이 나아진 덕분은 아니지만 아내 또한 꽤 오래전부터 가전제품을 A/S 받거나 할 때 수리기사가 다녀갈 때면 수리비에 꼭 만원씩 식사하시라고 더해준다. 아니면  아파트 경비실, 관리실 등 어떤 다른 대면 서비스를 받을 경우 항상 집 냉장고에 준비해둔 비타민 음료를 드린다.


 비타민 음료를 좋아하는 막내를 빼고는 그 비타민 음료를 건드리지 않는다. 언젠가 아내는 가전제품 서비스 기사분께 여쭤 봤는데 다른 음료보다는 양도 적당하고 해서 건강음료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비타민 음료가 떨어지지 않게 늘 준비해 두고 있다.


영화 ‘변산’의 그 노을

 특별하고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누구나 이처럼 몇 가지 정도는 이웃을 배려하는 작은 일들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을 줄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살림살이가 나아져서 그런 건 아니라고 믿는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우리 집엔 거실과 부엌 그리고 방마다 천장에 에어컨이 달려있는 집을 샀기 때문에 여섯 대의 에어컨이 있다.


 아이들 방에 달려있는 에어컨 두 대를 빼고는 나머지 에어컨은 일 년에 복날이나 손님이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동되지 않는 ‘관상용 에어컨’ 일뿐이다. 이젠 습관이 되어 아내에게 컴플레인도 안 한다. 물론 해봐야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할 뿐, 대신에 에어컨 숫자만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소리 없이 조용한 선풍기가 돌아갈 뿐이다.



 누군가를 배려할 때도 예의 있고 진정성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냥 배려해야 하는 당위성만으로는 어렵다. 배려를 받는 상대방도 배려를 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그 진정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진정성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 배려가 아니라면 그냥 기본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적선하듯 또는 상대방이 아닌 나의 품격이나 품위를 위해 오히려 존중 없는 배려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배려를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왕 그런 좋은 생각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할 필요도 있다. 언제나 사람을 대하는 기본은 ‘태도가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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