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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Dec 18. 2020

12월, 당신이 평안하시다면 저 또한 그렇습니다

잠시 멈추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케렌시아)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평화롭게 시작된 새해 초에 갑자기 유입된 중국발 코로나로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사회적 거리 두고, 멈추다 보니 12월, 무소유의 달( 퐁카족 인디언)이 되었다. 한 해를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보내는 마음이 허전해 갑자기 속초도 둘러볼 겸 관동팔경의 하나인 양양 낙산사 의상대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언제나 세상살이가 힘들 때마다 매번 생각을 정리하고 위로받을 겸 찾곤 하는 나만의 케렌시아( 스페인어로 Querencia ; 피난처, 안식처를 의미한다)중의 한 곳이기 때문이다.


낙산사 홍련암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소가 잠시 쉬는 곳이란 뜻처럼 산 소같이 치열하게 일하다가 잠시 멈추고 숨 가쁜 호흡을 정리할 때 혼자 찾아가서 위로받곤 하던 곳이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면 양양 낙산사에 도착해서 국수로 공양을 하고 의상대에 들러서 탁 트인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의상대의 바다 소나무 관음송과 얘기를 나누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나만의 케렌시아, 잠시 멈추고 쉬어가는 곳이다.


낙산사 의상대


 이십 년 전 설날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를 읽고서 그해 여름휴가 때 아내에게 허락을 구한 후 혼자 오래 기다렸던 영주의 부석사를 다녀왔다. 2001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는 이별의 아픔을 갖고 있는 두 남녀가 1월 1일, 새해 첫날에 눈이 내리던 부석사를 찾아가는 여정을 서사화한 소설이다.


 그 소설을 읽고 난 후, 영주 부석사와 양양 낙산사를 창건한 신라 의상대사가 유학했던 당나라에서, 선묘 낭자와의 국경을 초월한 애절한 러브스토리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는 두 사찰을 더욱 애정 하게 되었다. 지난여름에도 영주 부석사를 다녀왔다.


부석사의 부석
부석사 상사화


 그 가슴 아프고 애틋한 사랑 얘기를 길게 쓰고 싶지는 않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금방 찾아 읽을 수 있기에 존재 자체만 알리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에 가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만 기억했던 무량수전 왼편의 돌배나무 옆에 떠있는 돌, 부석이 있고 그 뒤편으로 선묘 낭자를 기리는 선묘각이 있다.


 사랑에 상처 받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석사를 찾아 위로받고 있다. 또한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에 올라 멀리 내려다 보이는 소백산맥의 등줄기를 바라보는 풍경은 굳이 김삿갓이 안양루에 올라지었다는 시를 빌리지 않더라도 부석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선물이 된다.


부석사 안양루


  90년대 초에 나에게 영주 부석사를 알려준 월간 ‘사회 평론’에 실린 연재물을 엮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부석사에 대한 자세한 학문적인 내용과 함께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수려한 문체로 서술해서 꼭 한번 영주 부석사를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그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의 부석사 창건 설화가 양양 낙산사 대웅전인 보타전 뒷벽에 벽화로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다.


 낙산사를 찾기 전에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절집을 둘러보면 또 다른 로맨틱한 산책이 되지 않을까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하룻밤 여유가 허락한다면, 일출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수고스러움만 극복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자 기쁨이 될 것이다.


보타전 벽화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오롯이 보낼 수 있는 자기만의 장소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어릴 때의 다락방이나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서재와 같은 그런 곳, 스페인 투우장에서 생사를 놓고 최고의 투우사와 한 판 결전을 앞두고서 잠시 거친 숨을 돌리던 황소처럼 우리도 생계를 걸고 일하는 치열한 직장 생활, 조직 생활에서 가끔은 그 존재의  생사를 건 기로에서 큰 일을 앞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 나만의 안식처인 케렌시아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치열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 것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나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 웃음 속의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에린 핸슨


원통보전 7층석탑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오랜 시간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이력과 생각, 그리고 그 사람이 경험하고 학습해온 인생의 철학, 또한 우리의 이웃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우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얼굴을 메이크업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12월, 다사다난했던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비록 예기치 못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부분의 일상이 멈춰 선 지금, 그 경험과 고통, 상처마저도 헛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한 겹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모두 평안하다면 나 또한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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