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경계인의 삶

by 봄날



디자인이 예쁘고 세련된 정수기가 아일랜드 식탁에 빌트인 되어 있는 광고 화면을 보던 아내가 너무 멋있다며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은 우리 삶의 영원한 화두인 의. 식. 주 중에서 먹는 것(식)과 사는 곳(주)에 대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집과 관련한 프로그램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 새로 시작한 ‘윤스테이’란 프로그램도 결국은 여행하고, 숙박하고, 요리하고, 먹고 마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즘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관찰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지난번 스페인의 어느 섬에서 진행했던 ‘윤식당’의 다른 버전이다. 몇 회 차가 지나기도 전에 여러 커뮤니티와 SNS에서 요즘 표현을 빌면 “난리 났네, 난리 났어”란 말을 실감케 했다. 그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주방기구들에 대한 관심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하늘공원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초부터 아시아의 최빈국에서 겨우 후진국의 초입에 있던 1960년대 초에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베이비붐 세대라고 부른다. 그분들이 보시기에는 지금과 같은 먹는 것과 사는 곳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관찰 예능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잘 모르겠다. 작년부터 각 방송마다 제공하는 트로트 방송은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너무 식상하고, 또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한 종편들의 뉴스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이 훨씬 정신 건강에 좋은 것 같다.


비록 일방적인 시청자이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당대의 관심과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세상의 변화를 소통할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가끔은 친구나 선후배를 만날 때면 뉴스만 보지 말고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웃고 즐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매일 뉴스만 보게 되면 늘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변해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덧붙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열되긴 했지만 트로트 관련 프로그램들이 어르신들의 정신 건강에 많은 기여를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젠가 나는 만약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유명 가수의 무명 백댄서로 살고 싶다고 했다. 물론 나는 한번 살아본 인생,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 그 꿈이 이루어질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그 꿈을 바꾸어야 할 듯하다. 나도 요즘 아이들이 선망하는 연예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연예인이 되면 데이트 소개 프로그램에서 결혼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아이를 낳으면 과외 프로그램에서 공부도 시켜주고, 또 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연예인인 아빠, 엄마와 함께 놀기만 해도 돈도 벌 수 있다. 그 부모처럼 연예인 되고 싶으면 그런 아이들만 모아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데뷔도 시켜준다. 또한 가족이나 주변인과 불화가 생기면 눈을 컨택해서 화해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엔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 살림 엉망으로 해도 감탄사만 연발하면 무료로 창고 같은 집을 신박하게 정리해주고, 설사 일하느라 가정에 소홀해서 서로 이혼하게 되면 다시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도 있어 원한다면 재결합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일하다가 스트레스받으면 바다낚시도 데려가고, 경치 좋은 곳을 수소문해서 멋진 캠핑카에 태우고 가서 힐링까지 시켜준다.


또한, 음주운전, 도박, 폭행 등 잘못이나 실수를 해서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찾아가서 반성하는 삶을 보여주고 다시 일할 수 있게 공감을 끌어내 주는 프로그램까지 있다. 물론 요즘 일반 시청자들이 방송을 소비하는 방식이고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니까 이런 프로그램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일반인에 비하면 정말 유독 그들에게만은 마당 쓸고 돈 줍고, 가재 잡고 도랑 치는 특혜가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배워야 한다. 총명한 요즘 아이들이 괜히 장래 희망 1순위가 연예인이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연예인이 된다고 하면 말 그대로 집안이 난리가 나곤 했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학습하지 않으면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스스로 성숙해지고 경험이 쌓이면서 유식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문물에 대한 무식이 늘고 경험한 것만 믿는데서 오는 고집만 세질 뿐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옳다고 믿는 확정 편향으로 대개는 매사에 불만이 많아지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만 늘게 된다.


지금의 중장년 세대는 10,20대 때에는 후진국에서 살았고, 30,40대 시절엔 개발도상국이란 중진국에서 살았다. 그리고 50,60,70대인 지금은 경제, 문화 강국인 선진국에서 살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이 2019년 국민 총소득(GNI)에서 세계 경제강국 G7의 이태리를 추월하고 캐나다를 바짝 뒤쫓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사회의 이곳저곳과 여러 가지 면에서 진정한 선진국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후진국, 개발도상국, 선진국을 모두 경험하며 살아내고 있는 중장년 세대가 중진국과 선진국만 살아본 당대인 젊은 청년 세대들보다 더욱 분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몸은 의식주 모두 선진국에 살고 있지만, 행동이나 생각은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에만 치열했던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몸과 마음, 어느 한쪽이 함께 성장하지 못하고 지체되고 정체된 분리 장애를 겪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청년세대들은 생각과 행동 등 모든 면에서 선진국답게 생활하고 있다. 카카오와 배민의 창업주들만 보더라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회의식과 함께 그들이 이룬 부의 절반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이룬 부는 특별한 행운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라며 겸손해했다. 이제 중장년 세대는 나라 걱정과 무거운 짐은 조금 내려놓고,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 만큼 훌륭한 청년 세대인 20,30,40대의 당대와 어울려서 남은 삶을 행복하게 누릴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으로서 지난 시절의 자부심만 가지고는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당대의 청년 세대와 어울려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고,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당대는 또 다른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내야 할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억울해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자신의 삶에 집중하면 된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는 어느 한 시대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속 가능한 성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변하게 하면 되고, 내가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은 나만 변하면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진국과 선진국의 경계에서 생활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모호한 경계인, 그 경계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