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창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가을바람과 함께 주말 오후에 커피 한잔을 내려놓고 TV를 보다가 우연히 ‘인간실격’(2021, jtbc)이란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게 되었다. 몇 년 전 보았던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 이후로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없는 걸 보면 근래 제대로 본방을 사수하며 보았던 드라마가 없는 것 같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이 아닌,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작품이다.
어두운 밤,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주인공 부정(전도연)이 배웅 나온 아버지에게 흐느끼면서 독백처럼 내뱉는 구구절절한 얘기에 이끌려 보게 되었지만 그녀의 대사에 특별히 감정을 이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그녀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아버지보다 더 가난해질 것 같다는 그녀의 독백에 마음이 저려오며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IMF 외환위기에 잘 나가던 회사가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삼분의 일 정도의 사업과 인원을 구조 조정하면서 존폐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였다. 급속히 성장하던 회사라 과장으로 팀장이란 중책을 맡은 지 일 년 만에 사업의 구조조정에 따라 감축 대상이 된 사원 명단을 손에 받아 들고 한 명씩 눈물의 개인면담을 끝낸 후 맞은 휴일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시던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 벨소리에 휴일 이른 아침에 잠이 깼다. 아버지는 내게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잠깐 보자고 하시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만난 아버지는 용기 잃지 말고 살라는 당부와 함께 두툼하게 돈이 든 편지봉투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는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라며 바로 뒤돌아 가셨다.
그때쯤 어느 버스회사 상무가 인원감축 구조조정을 끝내고 고통스러워하다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와 그 비슷한 소식들이 연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던 그맘때쯤이었다. 구조조정 개인 면담을 끝내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그 뉴스를 보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아버지도 그 비슷한 뉴스들을 보고 회사 특성상 외환위기에 힘들어하고 있을 내게 격려를 하기 위함이었으라 생각한다.
그때 나는 앞으로 내 인생에 다시 한번 이런 IMF 같은 사태를 맞게 된다면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고 내가 먼저 회사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십 년 후 그와 비슷한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를 맞았지만 퇴사는커녕 이미 경험한 외환위기의 매뉴얼에 따라 컨틴전시 플랜, 위기대응 시나리오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시나리오에 따른 대응으로 무사하게 조속히 위기를 극복했으며 우리나라 또한 별 후유증 없이 잘 넘어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게 다 그렇다. 조금만 더 살아보면 뭐 그리 새로울 것도, 대단한 것도 없다. 아마도 다들 그러고 살고 있을 것이다. 설사 무슨 대단한 일이 생긴다 해도 어떤 중대한 결심이나 엄청난 용기를 불러낼 각오는 하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면서 중심을 잘 잡고 그 순간에 당황하지 말고, 오버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지혜가 생겼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운 순간, 위기의 순간일수록 더욱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믿음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힘들지 않다는 게 아니라, 포기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 견디는 것일 뿐이다.
잘못 지은 집처럼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위기의 순간, 우리를 구원하는 힘은 무슨 대단한 용기도, 엄청난 각오나 중대한 결심도 아니다. 그 순간에 절대 당황하지 말고 오히려 침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쏜 화살이다. 그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얼마나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가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을 가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든,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