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족
한국 사회에도 파이어(FIRE)족이 상륙했다고 한다. 경제적 독립, 조기 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앞글자를 딴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 40대 초반 전후에 은퇴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젊은 고학력, 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퍼졌다고 한다.
해외 비즈니스를 할 때 상대 회사의 파트너를 보면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면서 왜 그렇게 치열하게 일을 해야만 하는지, 삶의 목표가 일을 통한 성취밖에 없는지 매우 궁금했다. 어느 날 일을 끝내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그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저녁을 함께 하면서 꿈에 부풀어 그가 계획하고 있는 미래의 삶에 대해 말했다. 나이 오십까지만 일하고 은퇴해서 아시아의 몇 개 나라에서 살아볼 계획을 설명했으며, 또한 그가 좋아하는 요트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꿈을 신바람이 나서 와인을 추가하며 저녁식사 내내 얘기해주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힘든 일도 참아내는 삶,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이 오십에 은퇴하는 것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사십 대 전후한 나이에 파이어족이 많이 생겨났고 또 그런 꿈을 꾸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니 왜 이런 트렌드가 생겼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생계유지를 위한 일의 개념이 삶 그 자체를 위한 생활의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통신환경의 발달로 인해 일터에 대한 출퇴근 개념이 많이 없어지고,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일과 생활의 구분이 점점 엷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굳이 사무실에 모두 모여 앉아서 일할 필요도 없고, 회의 또한 화상이나 메타버스를 통해서 할 수 있고, 일이라는 것도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인터넷 기반의 노트북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정한 고용이 늘면서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지고, 1%의 직장인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회사생활의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독립적인 파이프라인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어족은 연봉과 커리어를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얻고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닌, 시간이 많은 부자가 되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과 스스로 타임 디자인이 가능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삶은 학교 졸업하면 취업하고, 결혼하고 맞벌이하면서 육아와 회사일, 집안일에 지친 부부, 아이, 은퇴 후 그 아이를 돌보아야만 하는 그들의 부모, 모두가 지치고 힘든 생활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정해진 패턴에 따라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30년 은퇴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사십 대 전후면 아마도 부모의 도움이 없다면 부부가 회사 생활을 통해 벌고, 모을 수 있는 은퇴자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십억 미만이 대부분 일 듯하다. 또한 그중 집을 제외하면 오억 미만 정도를 여유자금으로 굴리면서 종잣돈 삼아 주식, 가상 자산 등에서 운용하거나 출퇴근이 없는 지식 노동자로서 독립된 일에서 생활비를 벌어 가며 살아야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파이어족은 돈부자보단 시간 부자의 여유를 갖고 싶어 하며, 삶의 목적이 중요한 사람들이다. 봄날이 가는지 가을은 오는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 아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제대로 맞이하고 느끼며 사는 삶이다. 일 자체가 목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은 삶의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누릴 수는 없다. 무엇을 갖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일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