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누구도 삶의 매 순간이 빛날 수는 없다

il silenzio(밤하늘의 트럼펫)

by 봄날


주말 저녁,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보던 중 이탈리아 북쪽 몬테 비앙코(몽블랑) 국경지역의 스키장 정상에서 이태리 노신사가 부는 트럼펫 소리에 시선이 고정되고, 몸이 먼저 반응하면서 갑자기 옛날 군대 시절의 취침나팔소리가 떠오르며 모든 생각이 정지되고 만다.


이탈리아 트럼펫 연주자겸 작곡가인 Nini Rosso가 연주한 il silenzio(침묵, 적막)란 트럼펫 곡이다. ​이 곡은 1950년대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전우인 프랭크 시내트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트럼펫을 불고, 연병장의 밤하늘에 울려 퍼지게 해 유명해졌다.



진혼곡으로, 또는 취침나팔로 있어빌러티(격조)가 있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땀과 눈물의 취침 점호가 끝나고 이 트럼펫 곡을 들으면 정말 상처 받은 영혼을 토닥이는 듯해서 다시 한번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진혼나팔의 유래는 남북전쟁 당시의 가슴 아픈 실화에서 유래된다.


미국 남북전쟁(1862) 당시 어느 전쟁터의 밤, 전투도 쉬게 된 한밤 중에 북군의 장교 엘리콤(Ellicombe) 대위는 숲 속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듣고 어둠 속에서 적군 인지도 모르고 부상당한 병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치료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생병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부상병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적군인 남군의 병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콤 대위의 손에 든 랜턴이 밝힌 것은 자기 아들의 숨진 얼굴이었다. 음악도였던 아들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 남군에 자원입대한 것이었다. 황망한 순간, 떨리는 손으로 엘리콤 대위는 아들의 군복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악보를 발견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엘리콤 대위는 상관의 특별 허가를 얻어 비록 적군의 신분이지만,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엘리콤 대위는 상관에게 한 가지를 더 청원했다. 장례식에 군악대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이 요청은 장례식의 당사자가 적군의 병사라는 이유에서 불허되고 만다.



하지만, 상관은 엘리콤 대위에게 단 한 명의 군악병만을 쓰도록 허락하였고, 엘리콤 대위는 자기 아들의 장례식을 위해서 나팔수 한 사람을 선택하고는 그 군악병에게 아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악보를 건네주며 불어달라 했다고 한다.


또한,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2004, 감독 유장하)’에서 트럼펫 연주자겸 음악 선생님으로 열연한 최민식, 그리고 저녁 해 질 무렵의 쓸쓸한 바닷가에서 그의 연인 김호정이 혼자 낯선 소년으로부터 듣게 되는 트럼펫(옛사랑을 위한 트럼펫)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그처럼 우리는 소소하지만 작은 기억들이 쌓이고 소중한 추억이 되면서 문득문득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잠시 힘든 세상을 내려놓고 미소 지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한다. 우리가 생의 한순간도 시간처럼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누구도 삶의 매 순간이 빛날 수는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