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슈퍼리치들의 삶처럼 알람이 필요 없는 충분한 잠을 자고, 아침 커피타임을 즐기고 난 후 청명한 가을 날씨를 두배로 즐겨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멀지 않은 연천의 한탄강으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꼭 한번 둘러보고 싶었던 한탄강 재인폭포로 가는 둘레길을 걸으면서 가을바람과 함께 산책길의 백일홍과 국화가 시들해져 있는 것은 지난 주말 때 이른 겨울 찬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한탄강 지질공원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만들어진 데크길을 따라 산책하면서 중간중간 쉼터에 붙여놓은 유래와 전설을 읽어보던 아내는 재인폭포와 폭포가 위치한 지역인 연천군 고문리의 유래를 알고 난 후, 내게 왜 옛날 남자들은 그렇게 찌질했냐며 컴플레인을 했다. 그 지역의 전설과 유래에 대한 지적 호기심보다는 시월의 멋진 가을 풍경에 매료되어 있던 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도발에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그 고문리와 재인폭포의 유래는 재인폭포가 속한 행정지역의 고을 원님이 줄 타는 재주가 뛰어났던 한 재인의 아름다운 아내에 대해 흑심을 품으면서 시작되었다. 지금 재인폭포를 전망할 수 있도록 계곡을 가로지른 출렁다리처럼 줄을 매달고 그 재인이 건너가는 줄타기 재주를 보게 해달라고 하고는 그 동아줄을 미리 반쯤 잘라놓아 줄타기 재주를 부리던 재인은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재인의 아내는 자신을 탐하려 했던 원님의 코를 깨물어 그 지역은 코를 문이가 살았다 해서 코문리, 오늘날의 고문리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전설을 듣고 난 후 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 괜히 활짝 핀 억새풀을 가리키며 화제 전환의 스킬을 시도했지만 아내는 분이 안 풀렸던지 임진왜란, 병자호란부터 한일합방까지 지금의 정치처럼 양 진영으로 나뉘어 입맛대로 멀쩡한 사실관계를 왜곡하며 당파싸움에 몰입한 결과 나라를 망하게 하고 애꿎게 힘없는 여자들만 멀리 이국땅으로 끌려가 모진 수모를 겪게 했다며 원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해주진 못할망정 스스로 천신만고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지만 환향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던 옛날 남자들의 찌질한 모습을 내게 투영하고 있었다.
시월의 멋진 가을날에 한층 더 나날이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선물하고자 했던 아름다운 마음에 약간의 금이 가긴 했지만, 아내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닐뿐더러 남녀의 논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얻을 게 없다는 현명한 생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든 옛날 남자들을 함께 욕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 상사와 논쟁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 회사에 안 다녀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받기 십상이고, 사랑하는 애인과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를 따지겠다는 것은 더 이상 너랑 안 만나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배가 불렀을 때보다는 배가 고플 때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고 이성적일 때가 많다. 재인폭포 둘레길 산책을 마치고 주차장 입구에 표지판으로 안내해 놓은 멀지 않은 지역 맛집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리모델링 중이라 이웃 맛집인 수타 손짜장에서 면발이 고무줄같이 탄력 있는 맛있는 간짜장을 먹고는 마음이 넓어져서 아내가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포천 멍우리협곡 하늘다리로 내달렸다.
이 십여분 거리의 멍우리협곡 하늘다리에 도착하자마자 백팩을 찾던 아내는 그때서야 그 수타 손짜장 맛집 의자에 걸어두고 나왔음을 발견했고, 나는 재빨리 전화번호를 검색해 아내에게 전화를 연결해주었다. 다행히 백팩이 그대로 있음을 알고는 하늘다리를 둘러보고 찾으러 갔다. 내가 선물한 명품백팩이었던지라 기분이 좋아진 아내에게 다시 그 맛집으로 백팩을 찾으러 돌아가던 중에 아까 재인폭포에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했다.
그래도, 우리나라 요즘 남자들은 세계 6대 군사강국을 만들고, 세계에서 7번째로 인공위성 누리호 쏘아 올리고, 잠수함 발사 SLBM과 5세대 스텔스 전투기 KF21 도 만들어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손흥민, BTS,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도 있지 않느냐며 변호 아닌 변호를 하고 아내도 쿨하게 인정했다. 착각은 짧고 오해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