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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에겐 추억만,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respect & tender

by 봄날


며칠 전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가까운 마트를 다녀온 아내가 월드컵 예선 경기를 보고 있던 내게 수제 강정을 내밀었다. 마침 출출하던 차에 반가운 마음과 함께 어디서 난 거냐고 물었다. 마트를 둘러보던 중 나이가 좀 있으신 주부사원이 너무 맛있는 과자라며 권하기에 뿌리치지 못하고 샀는데 그 사원이 돌아서는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며 인사를 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얼마 하지 않는 과자를 그녀의 말을 믿고 사주었는데 그 사원이 행복해 보여서란다.



다행히 그 수제 강정은 시장기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정말 맛있었다. 그래도 나는 옛날 기억이 나서 아내에게 그런 충동구매를 하고 싶을 때마다 이십 년 전쯤의 추석 때 사 왔던 그 ‘사골’을 상기하라며 웃으며 말했다. 그 사골 사건은 그해 추석 명절 하루 전에 일어났다. 추석 연휴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두 손에 바라바리 시장을 보고 오던 중, 아파트 단지 입구에 멈춰서 있던 냉동탑차 앞에서 사골을 팔고 있던 아저씨가 아내에게 구매를 권유했던 모양이었다.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야 되는데 몇 개 남지 않은 사골을 못 팔아 아직 고향으로 출발을 못하고 있다며 반값에 주겠다고 했다 한다. 아내는 딱한 사정을 듣고 사주고 싶지만 두 손에 시장 본 게 많아서 들고 갈 수가 없다고 했더니 아파트까지 함께 배달을 해주겠다고 해서 사골 한 짝을 구매했다고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집까지 사골 상자를 날라준 그 아저씨가 고마워서 고향 내려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저녁 사 드시라며 만원을 더 주었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추석 명절에 영문도 모르고 아내가 나를 위해 밤새 끓여준 우유빛깔 사골국을 연휴 내내 너무 맛있게 먹고는 연휴가 끝날 무렵 우연히 사골이 어디서 난 거냐며 묻는 과정에서 그런 연유를 듣고는 나는 더 이상 그 사골국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사골국이 뽀얗게 우러난 걸 보면 가짜는 아니라며 큰돈도 아니고 그냥 그 아저씨가 기뻐했으니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유통기한이 지난 불량 사골을 파는 그런 류의 사기꾼들이 뉴스에 나오고 나서는 현실을 직감했다.



오랜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많은 경험과 더불어 항상 이유 없는 호의나 친절, 또는 지나치게 붙임성 있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나는 특별히 더 경계하는 버릇이 있다. 특히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예의 그 싹싹함과 함께 붙임성 있게 굴거나, 아주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지인이 갑자기 나타나 너무 반가운 척을 하면 대개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다.


맛있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처럼 모든 관계는 일정한 시간 이상의 숙성이 필요하고, 지금처럼 발달된 통신수단과 SNS가 난립하는 시대에 남녀관계가 아닌 이상, 정말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오 년, 십 년 이상 연락을 안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썩 좋지 않은 버릇인 줄은 알지만 오랜 사회생활의 누적된 경험상 그런 관계가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경험 때문이라 어쩔 수가 없다.



축구를 보면서 방금 사온 수제 강정을 주전부리 삼아 먹으면서 오랜만에 그 ‘추석 사골’ 얘기를 추억하면서 둘이 한참을 웃었다. 지금의 도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결혼 초부터 아내는 가까운 전철역 주변에서 봄나물이나 채소류를 파는 길거리 노점 상인들에게서 일부러 시장을 보곤 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나 할머니들로부터 절대로 덤을 얻거나 흥정을 하지 않고 부르는 가격을 다 주고 샀다. 말단 사원 시절이었으니 가정 형편이 좋을 때도 아니고 아끼고 살아야 했지만, 최소한 길거리 노점상들에게는 결코 흥정하지 않았고, 덤을 더 준다 해도 받지 않았으며, 내가 정시 퇴근을 해서 오는 날은 일부러 동네 산책을 하면서 그들에게서 시장을 보곤 했다.


금오름


가끔은 그런 아내의 행동이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심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소비생활에서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내라 결혼 초부터 화장실 다녀와서 깜박 잊고 전기불을 켜놓은 것,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전철역까지 기본요금의 택시 탄 것을 가지고 가장 많은 다툼이 있었다.


지금도 천장의 시스템 에어컨이 여섯 군데나 달려있지만, 각 위치마다 그 숫자만큼 소리 없는 선풍기가 매년 여름이면 조용하게 돌아간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삶으로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아내는 늘 나보다 백배는 훌륭하고 존경스럽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추억만 있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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