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것(not)
언젠가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 출연자가 가스라이팅이란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에 조작을 가해 자신을 불신하고 가해자에게 의존케 하는 심리적 학대라고 정의하면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부모 입장에선 아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때로는 의도치 않게 가스라이팅이 되어 자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험을 망쳤을 때, 아이들의 마음이 상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시험을 망쳐서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마음이 안 좋다는 아이와 자신이 아빠한테 혼날까 봐 걱정이 된다는 아이가 있는데 둘 중 어떤 게 더 바람직한 반응일까 궁금했다.
일반적으로는 내가 시험을 망쳐서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하는 아이가 더 엄마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시험을 망쳐서 아빠한테 혼날까 봐 걱정하는 아이보다 바람직한 태도일 것 같지만 오히려 아빠한테 혼날 것을 걱정하는 아이가 긍정적인 태도라고 한다.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하는 아이는 '내 마음' 보다 '엄마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이기 때문에 차라리 아빠한테 혼이 날 '내 마음’, 즉 나를 걱정하는 쪽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험을 망쳤을 때, 또한 엄마가 아닌 아이를 주체로 반응을 해줘야 한다는 말인데 새겨볼 만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아이가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키울 수 있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세대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오래전에는 유교적 교육의 영향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늘 나보다는 주변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학습해온 결과, 우리는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세상의 중심에 나 자신을 놓고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는 주체적인 태도와 주관적인 감정표현의 마음가짐이 항상 부족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우리나라 말이 “아무거나”일 것이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나의 취향이나 스타일을 물어보면 나보다는 묻는 사람의 취향과 스타일을 배려해 “아무거나”라고 표현하며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분명 해지는 것은 좋아지는 것들은 아직도 여전히 희미하지만, 싫어지는 것들은 제법 분명해지는 것 같다. 이제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가끔은 그런 문제로 상대방을 머쓱하게 할 때도 있지만 이젠 가능하면 나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을 누구한테라도 존중받으며 살고 싶다. 지금까지 너무 주변 사람들만 배려한 것에 대한 반동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만 모든 관계나 만남에 진심이 있고 즐거운 만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해야 남들도, 주변 사람들도 나처럼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새해의 트렌드는 ‘신념의 시대’라고 한다. 자신이 믿는 신념, 즉 어떤 것들에 자신의 진심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 한다. 진심이 ‘아닌 것’에 대한 나의 신념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무엇에 나의 진심이 있는지를 찾는 것일 수도 있다. 에린 핸슨(Erin Hanson)의 시, ‘아닌 것’(Not)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본다.
아닌 것(Not)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나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 웃음 속의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에린 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