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FM 음악방송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지만 휴가를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는 “배우 강석우는 27일 CBS 라디오 음악 FM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며 이날이 마지막 방송이라고 알리고,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 이후 한쪽 눈의 시력이 점점 나빠졌고, 모니터 화면의 글을 읽기 힘든 상황"이라며 "이 방송을 그만두지만 제 목소리나 얼굴은 다른 매체를 통해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뉴스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모닝커피를 즐기는 나의 가장 소중한 아침 시간을 함께 해주었다. 그의 목소리를 당분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매일 반복하던 평범한 일상의 한 축이 무너져버린 느낌이 든다. 늘 모든 것이 그대로일 것만 같은 생각은 착각이라고 일깨워주었다. 그분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다시 그 음악방송의 진행자로 건강하게 돌아와서 나의 소중한 일상을 복원해주시리라 믿는다, 아니 기도했다.
설날 연휴 첫날,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요즘 장안의 화제라는 그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 mbc)’을 연이어 재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읽었던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이 활동했던 동시대라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하루에 서너 편씩 보려면 자발적 폐인이 되어야 했기에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정조 이산은 왕이 되기까지 그 드라마처럼 험난한 과정을 거쳐 조선의 왕이 되었다. 정책과 학술을 연구하고 젊은 인재를 키우고 찾아내는 규장각의 설치, 노비제도의 폐지, 당파와 상관없이 서얼을 포함 고루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 수원화성의 축조 등은 물론, 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전횡을 일삼던 핵심 측근 그룹 동덕회 출신, 홍국영 등 초기에 주변의 적폐를 청산하고 많은 경제,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할아버지 영조처럼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죽음을 맞이해 개혁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아닐까 독살설 등 의문이 일었다. 그 후 수렴청정과 다시 외척들이 세력을 잡고 힘없는 순조, 헌종, 철종 등 모두 20,30대 초반에 요절하면서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흥선대원군을 거쳐 한일합방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정조의 개혁정책이 지속되고 성공했다면 한일합방, 6.25 전쟁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조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조선의 성군으로 손꼽히지만 의문의 죽음으로 인해 경제개혁, 사회개혁을 위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폐기되었다. 역사는 늘 다시 되풀이된다. 과거를 잊은 사람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나는 새해에 많은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니 오십이 넘으면서 나는 무엇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더 이상 아무것도 빌지 않게 되었다. 대신 새해에는 가족 모두의 건강만을 기원하고, 그냥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서 갑자기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제법 인생을 살아보니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해 초만 되면 수많은 소원과 기도에 응답하시느라 너무 바쁘실 것만 같은 하느님을 배려하고, 또한 그것이 누구에게나 공정일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지켜내면 스스로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값진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