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블리비아테(Obliviate)
설날 연휴를 며칠 앞두고 인터넷 뉴스를 보면서 “70년대생 이후 고학력 여성 애 안 낳는다"라는 기사를 읽다가 아래 댓글을 보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편으로는 공감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갈는지 매우 궁금해진다. 21세기인 지금도 이런 상황이거늘 몇 천년 동안 여자들은 어떻게 삶을 유지해왔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는 것부터가 불평등, 불공정이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직장 일을 하는 여성들이 우러러 보이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물론 나는 남자로 삶을 시작해서 아직도 체험적으로 그 불평등 구조를 완전하게 공감할 수 없고 충분히 표현할 수도 없다. 이제 나이가 들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세상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을 가지다 보니 뒤늦게 입장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사회적 기득권은 언제나 남성들에게 있어왔다. 앞으로도 기대만큼 속도감 있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런 점은 선진국들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심지어 후진국들은 불평등, 불공정을 떠나 데이트 폭력 등 여성들을 위협하고, 핍박하고 자유의지를 구속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남자로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만 많이 했을 뿐, 여자들이 겪고 있는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해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특별히 개선해보려는 의지가 부족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그래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 때문에 군대 가는 것이라도 내세울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을 것 같다. 지금 중장년 세대들 대부분 마찬가지 겠지만, 아내와 오래 함께 있거나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나는 죄인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참 치열하게 삶을 살아낼 때 여자로서의 숙명적인 삶을 힘겹게 살아내면서 많이도 억울하고 서운했음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나도 열심히 살았으니 그 억울함을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도 뭐 특별한 가혹행위는 하지 않으니 가만히 들어만 주면 된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가끔씩 욱해서 상태를 악화시키는 어리 석은 짓을 하는 게 흠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현재도, 미래에도 힘들 것만 같은 슬픈 생각이 든다. 지금은 임신, 출산, 육아, 가사노동에 더해 직장 일까지 해야 된다. 요즘은 여자들도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결혼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느 워킹맘의 독백처럼 우리 사회의 보육환경은 특별히 나아지지 않았으며, 그 육아마저도 그녀의 어머니들이 또한 대부분 감당하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또다시 딸을 낳은 게 불공평한 시작이 되어버렸다.
아내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또, 가끔씩 나도 모르게 죄인이 될 때마다 ‘*오블리비아테(Obliviate)'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한편으로는 젊을 때 좀 더 배려하고 가사노동을 내 일처럼 할걸 그랬다고 후회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 언제나 후회란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일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가사노동만큼은 도와주는 게 아닌, 내 일처럼 해야 반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아내가 부탁하는 일을 들어주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블리비아테(Obliviate)는 해리포터에서 사용된 기억을 지우는 마법, ‘좋은 기억만 남겨두고 나쁜 기억은 지우는 주문'을 의미하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