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이런.'
예랑은 자신의 등뒤에 붙어있는 아픈 예꼬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인간의 영혼이 타인의 슬픔을 선택하는 바람에 바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닫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임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가 아기 천사 예꼬와 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천사에게 임무 수행을 절대적인 것이었고, 천사인 예랑 역시 그 절대 규칙을 어길 순 없었다.
'어차피 해야 하면 빨리 해치우는 수밖에...'
예랑이 등 뒤 예꼬를 살피며 다짐한다. 예랑은 자신의 손에 건네 쥔 인간 영혼이 선택한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눈앞으로 들어 올린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들어 올려진 슬픔이 빙글빙글 돌아가는가 싶더니 빠르게 예랑의 눈앞에서 회전하기 시작한다. 회전이 작은 바람을 일으키는 어느 순간, 예랑이 감았던 눈을 크게 뜬다. 그러자 예랑의 눈동자에 중년 여성이 선택한 타인의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물들며 그려지기 시작한다.
***
<인간계의 어느 날>
예랑의 눈에 제일 먼저 인간계의 시끌시끌한 밤거리를 빼곡히 채운채 걷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보인다. 밤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간판들이 길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번쩍임에 질세라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으,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데... 인간들은 뭐가 좋다고 맨날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건지 모르겠어. 그나저나 인간이 선택한 슬픔의 주인공인 영혼은 어디에 있으려나...’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야로 예랑의 눈이 화려한 밤거리를 시끄럽게 걷고 있는 인간들의 얼굴을 빠르게 스치며 살피며 지나간다.
'근데 무슨 축제라도 있는 건가? 인간들 얼굴이 다 왜 이래? 복장은 또 왜 이렇게 역겹지?'
인간들이 하나같이 얼굴에 기괴한 분장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예랑 자신의 천사의 고리와 비슷한 고리를 머리 위에 막대기를 연결해 매달고 있다. 또 누군가는 빨간 피가 잔뜩 묻은 하얀 붕대를 온몸에 두르고 있고, 그 주변 다른 인간은 둥그런 주황색 호박모양의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다.
‘이래서는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나... 흠... 어쩐다...’
예랑은 곤란하다는 듯 조금 더 인간들 가까이 내려와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그런 예랑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의식하지 못한다.
‘응? 저건... 악마들?’
그런 예랑의 눈에 수많은 인파 사이사이에 끼어 악마 특유의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악마들이 들어온다. 가만 보니 그 악마들과 뒤섞인 인간들의 기괴한 분장이 마치 그 악마를 흉내 내 따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인간들을 지켜봤어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족속이란 말이지. 악마 따위나 따라 하다니. 참.’
예랑의 입가에서 나지막이 한숨이 새어 나온다.
바로 그때 예랑의 눈에 자신이 찾던 여학생이 들어온다.
‘찾았군.’
중년 여성이 선택한 슬픔의 주인공인 그 여학생 역시 주변 여느 인간들처럼 악마를 따라한 듯한 분장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새하얀 칠을 하고 눈 밑으로 새빨간 핏자국을 눈물자국처럼 그려놓았다. 입가에는 찢어진 입을 표현한 듯 한 기괴한 빨간 칠이 되어있었고, 등 뒤에는 악마의 새까만 날개 모양을 붙였다. 입고 있는 교복은 이곳저곳 찢겨져 있었으며, 곳곳에는 정말 악마의 그것처럼 진득해 보이는 새빨간 핏자국이 묻혀있었다.
‘어휴. 끔찍하게도 따라 했네. 빨리 슬픔이나 확인하고 떠나야지. 진짜 싫다. 근데 무슨 슬픔인거지?’
여학생을 찾아낸 예랑이 처음 슬픔을 들여다보기 위해 했던 그때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러자 마치 영상이 빠르게 흘러가듯 그 여학생을 중심으로 슬픔의 장면이 빠르게 전환된다.
‘슬픔의 순간은... 여기쯤인가?’
빠르게 흘러가던 장면이 멈추고 다시 그 여학생이 예랑의 눈에 들어온다.
그 여학생이 폭이 무척 좁아 보이는 내리막길 골목길에 들어선다. 그 골목길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앞으로 가지도 뒤로 가지도 못한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엔 이상하게도 인간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악마들이 같이 뒤섞여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웃어대고 있었다. 그들이 악마임을 알리 없는 주변 인간들도 그들을 따라 소리치며 웃고 떠들며 재밌다는 듯 서로를 밀고 밀치고 있었다.
그 상황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예랑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골목길이 너무 좁고, 인간들이 너무 많다. 주변은 시끄럽고, 왜인지 다들 흥분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들의 수가 평소와 달리 너무 많다. 불길한 눈빛에 예랑이 주변을 둘러본다.
있다. 분명히 주변에 천사들이 있다. 골목길에 자리 잡은 악마들의 숫자보다 현저히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분명히 자신과 같은 천사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왜인지 겁에 질려있는 게 느껴진다. 악마들과 달리 인파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천사들은 골목길 주변에 떠다니며 불안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다. 그 천사들의 머리 위 천사의 고리가 모두 붉은빛을 띠고 있다.
‘응? 저건? 신의 순간? 쯧. 하필 이럴 때.’
천사들의 고리가 붉은색으로 변한 걸 알게 된 예랑은 그들의 처지를 단번에 이해한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운명의 시간, 바로 절대자인 신의 순간이 그곳에 있는 중이었다.
신의 순간은 일정 시간과 장소에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이라 자신과 같은 한낱 천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절대적인 순간에 천사는 인간계에 관여할 수가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원래대로라면 악마들도 그런 천사와 같이 신의 순간에 관여하지 못해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언젠가부터 악마들은 그런 제약에 상관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운명의 시간, 신의 순간을 정해놓은 신이 그 옛날 <태초신>인지, 아니면 지금의 위대한 세 신이 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들이 이걸 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천사가 그것도 모르냐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천사는 신이 아니었다. 천사는 그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에게 당연하다는 듯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인,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을 아주 조금 더 갖고 있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예랑은 생각했다.
신의 순간을 깨닫고 나자, 어느새 예랑도 주변 천사들과 똑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뻔히 인간들이 겪게 될 비극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표정.
물론 지금 그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 그저 슬픔 나무에서 선택된 다 지난 옛날 일이란 걸 알면서도 예랑은 마치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도 되는 양, 지친 눈빛으로 다시 그 여학생을 쫓는다.
여학생은 수많은 인파에 한 중간에 끼어있었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고, 등뒤에 붙어있던 까만 날개는 진즉에 일그러져 다 뜯겨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 주변에 그녀처럼 끼여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살려달라고.
이러다 다 죽는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앞 뒤로 사람에 치여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쥐어짜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들에게 끼여있던 슬픔의 주인공인 그녀는 소리도 못 지른 채 사람들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있었고, 다리를 포함한 하체는 피가 통하지 않아서인지 굳어져 걸음도 옮기지 못한 채 그저 인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아직 희미하게 의식은 있는 상태였지만, 호흡이 급격히 느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살려달라는 인간들의 절규와 악마들의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좁은 골목길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천사들이 떠있는 공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천사인 예랑 자신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옥이건만,
지옥이 있다면 지금 자신의 눈에 들어온 이곳 같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신은 왜 이렇게 가혹한 것인가?’
천사들에게 있어 신이란 존재는 절대적이기에, 그들이 정해놓은 신의 순간인 운명의 시간에 의문을 갖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예랑은 달랐다.
이렇게 선명하게 운명의 시간을 맞닥뜨린 적은 처음이었지만, 막상 그 속에 끼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을 보고 그런 인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자, 도대체 신은 왜 이렇게 가혹한 운명의 시간을 인간에게 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분노로 바뀌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왜 천사인 자신이 절대적인 신의 규칙에 분노를 느끼는지,
그저 절대자인 신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다른 천사들과 다른 건지 예랑은 알 수가 없었다.
여학생의 슬픔을 지켜보던 예랑이 눈을 질끈 감는다. 어서 이 망할 신의 순간에 갇힌 그녀의 슬픔이 끝나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래본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예랑이 다시 눈을 뜬다. 안타깝게도 아직 슬픔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랑의 눈에 새까만 아스팔트 위에 아무렇게나 눕혀진 그 여학생이 보인다.
의식이 없다.
아직 죽음에 이르진 않았지만 아이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여학생의 주변으로 긴급 비상 상황을 알리는 날 선 사이렌이 끝없이 울려대고 있었고, 새빨간 빛을 번쩍이는 구급차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길게 아까의 그 골목길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급차들 옆으로 여학생과 같은 수십 명의 인간들이 비슷한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살아있는 다른 인간들이 누워있는 인간들을 하나라도 살려보려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몇몇의 인간은 이미 숨이 멎었는지 머리 위까지 녹색 모포가 덥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녹색 모포는 늘고 또 늘어나 새까만 아스팔트 길을 녹색 잿빛으로 길게 잇고 있었다.
예랑이 누워있는 여학생의 곁으로 날아 다가선다.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인간의 숨결이 이렇게나 가까이서 느껴지고 있건만 슬프게도 천사인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무력한 고통을 느끼는 천사라니.
한낱 인간의 죽음에, 슬픔에 이렇게 쉽게 공감하다니. 그게 천사라니.
꽤 오랜 세월 동안 타인의 슬픔을 선택한 인간의 영혼이 없었기에 인간의 슬픔을 들여다볼 일이 없었기에 예랑에게 이것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진한 슬픔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점점 숨결이 잦아드는 여학생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예랑은 슬픔 나무의 정원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신의 존재가 슬퍼짐을 느낀다.
아빠와 엄마 천사는 이런 슬픔을 감당하면서, 어떻게 그때 어렸던 자신에게 매일, 매 순간 그렇게 밝은 웃음을 지어줄 수 있었는지 묻고 싶어 진다. 그때의 아빠, 엄마 천사만큼 자란 자신이지만, 여전히 이런 슬픔 앞에서 나약하게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존재가 슬퍼진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슬픔을 향해 밝은 웃음으로 위로해 줄 그들을 더 이상,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엄마.. 아빠... 미안해...”
삶이 죽음을 마주한 마지막 순간, 찰나에 허락된 여학생의 의식이 나지막한 한마디를 토해낸다. 그 말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의 순간, 운명의 시간이 끝나고, 비통한 표정의 천사들이 하나라도 많은 생명을 구하려 인간들에게 빠르게 날아들기 시작한다.
그들의 그런 날갯짓이 무색하게, 예랑이 지키던 여학생의 마지막 숨결이 공중으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