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
슬픔 나무 정원 입구 오두막 처마에 달린 풍경이 처연한 소리를 내며 예랑의 도착을 알린다.
‘이상하게도 풍경 소리가 좋단 말이지.’
예랑이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천사의 고리에 연결된 인간의 영혼과 수호령이 보인다. 예랑은 수호령에 연결된 자신의 빛을 천사의 고리로 회수한다. 그러자 연결되어 있던 끈이 사라지며 인간의 영혼과 수호령이 공중에 둥실 떠오른다.
“넌 대기해.”
예랑이 수호령을 향해 차갑게 말한다.
“넌 따라오고.”
이번에는 인간의 영혼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인다.
‘흐음... 예꼬는 어쩐다...’
자신의 등에 업힌 채 곤히 잠들어있는 예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예랑은 예꼬를 등에 태운 그대로 슬픔 나무의 정원을 향해 눈이 두텁세 쌓인 길을 나선다. 그런 예랑의 뒤를 중년 여성의 영혼이 따른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명찰이 들려있다. 예랑은 괜히 그것에 눈길이 잠시 머물지만, 묻지 않기로 한다.
사연 없는 인간이 없고, 눈물 없는 영혼은 없다는 걸 알기에 구태여 남의 슬픔까지 딱히 알고 싶지 않다. 그렇게 슬픔 나무 정원을 가로질러 차분히 걷던 예랑이 새하얀 눈이 두텁게 내려앉은 거대한 슬픔 나무 한그루 앞에 멈춰 선다.
“자, 인간. 나는 이제 여기 그대로 서 있을 거야. 내 뒤에 있는 이 나무 보이지? 너는 지금부터 홀로 이 나무 둘레를 빙- 돌면 돼. 그리고 도는 동안 이 나무에 묶여있는 수많은 인간들의 슬픔을 보게 될 거야. 당연히 너 자신의 인간세상에서의 슬픔도 보게 될 테지. 슬픔 나무에 묶인 수많은 슬픔들 중 너는 반드시 한 가지를 선택해서 지금 내 앞에 다시 가져오면 돼. 네 슬픔을 선택해도 되고, 타인의 슬픔을 선택해도 되지. 뭘 선택할지는 당연히 니 마음이고. 그리고... 음... 그다음은... 그 선택을 확인하고 다시 알려주도록 하지. 자, 갔다 와. 조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인간의 영혼을 향해 예랑이 관심 없다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예전 자신의 아빠 천사는 좀 더 중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인간 영혼들에게 설명했던 것 같은데, 왜인지 자신의 설명은 아빠의 그것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예랑은 매번 하는 설명임에도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의미 전달만 되었으면 되었다 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짧게 설명을 마쳤다. 다행히도 이번 영혼은 한 번에 알아들었는지 빛으로 반짝이는 자신의 발걸음을 슬픔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런 영혼을 가만 지켜보던 예랑은 이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시선을 거둬 등 뒤에 예꼬를 살핀다. 아직 아픈 기색은 있지만, 그래도 어제 새벽과는 확연히 다르게 편안히 잠들어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예꼬는 자신의 길고 흰 손가락을 들어 예꼬의 이마를 한번 짚는다. 그리곤 다른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댄다. 예꼬의 열이 한결 떨어진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불편한 시선이 느껴져 예랑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슬픔 나무를 향해 걷던 중년 여성의 영혼이 나무 앞에 멈춰 선 채 예랑과 예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던 예랑의 눈에 그녀의 영혼이 부르르 떨고 있는 게 보인다.
'하... 여러모로 특이한 영혼이네. 무슨 사연이길래... 참'
예랑이 자신의 천사의 고리에서 새하얀 빛을 쏟아낸다. 그러자 눈이 부셔서인지 인간의 영혼이 눈길을 거두고 나무 둘레를 돌기 시작한다. 나무 위아래 묶여있는 수많은 인간들의 슬픔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그래도 다행이군. 오늘은 이 영혼 하나뿐인 거 같으니 말이야. 그러고 보면 점점 줄어드는 거 같기도 하고. 인간계 출생률이 많이 떨어져 인간들이 없다더니 그 영향인가? 아함~ 새벽부터 병원에 달려갔더니 피곤하네. 얼른 마치고 좀 쉬어야겠어. 예꼬도 얼른 쉬게 해 줘야겠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예랑이 하품을 쏟아낸다.
“아기 천사가 너무 예뻐요. 그런데 계속 자네요. 원래 아기 천사는 그런가요?”
언제 나타났는지 어느새 예랑의 옆에 다가온 중년 여성의 영혼이 예랑에게 속삭인다.
“아, 아기가 조금 아파서.”
피곤해서인지 영혼의 존재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예랑이 화들짝 놀라며 평소 그 답지 않게 대답을 뱉는다.
“이런. 아기 천사가 아프군요. 너무 힘드시겠어요. 아기가 아프니.”
인간 영혼이 예랑을 향해 말한다. 원래대로면 임무 수행 할 때는 예꼬는 오두막에서 놀게 하고, 예랑 혼자 인간 영혼을 인도하는지라 이런 일이 일어날 일이 없다 보니 예랑은 인간의 영혼이 자신을 걱정하는 이 상황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왜인지 불편하기보다, 아기가 아파서 속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하지만 이내 한낱 인간의 영혼에게 고결한 천사의 걱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라 자신을 다독이며 임무를 이어가기로 한다.
“흠흠... 슬픔 나무는 다 돌았나? 그래, 그럼 아까말한 대로 슬픔은 골라왔겠지? 자, 너의 선택을 한번 볼까?”
예랑이 인간의 영혼을 향해 묻는다. 하지만 물으면서도 예랑은 그 영혼의 선택이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나무에 묶인 수많은 인간들의 슬픔 중 자기 자신의 슬픔을 선택할 것이다.
대부분의 모든 인간의 영혼들이 그러했듯이.
슬픔 나무를 돌며 수많은 인간의 슬픔들을 마주한 인간의 영혼들의 선택은 늘 같았다. 다른 사람의 슬픔보다 자신의 슬픔을 선택한다.
나무를 돌며 다른 이들의 슬픔을 보더라도, 결국 자신의 슬픔이 가장 슬프다고 확신하게 되는 족속이 바로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렇게 타인의 슬픔보다 자신의 슬픔만을 보는 이기적인 존재니까.
사실 슬픈 나무의 정원에는 인간의 영혼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는 비밀이 있다.
바로 인간의 영혼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생과 사의 갈림길이 달라진다는 것.
슬픔 나무의 정원에 오는 인간의 영혼은 사실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은 영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원에 누워 다 죽어가던 이 중년 여성처럼, 어떤 이유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 즉 사경을 헤매는 인간의 영혼 중 일부만이 이렇게 슬픔 나무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슬픔 나무에서 타인의 슬픔이 아닌 자신의 슬픔을 선택한 순간, 그 인간의 영혼은 '완전히' 죽게 된다. 인간계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그의 육신의 숨결이 바로 끊어진다. 그렇게 죽은 인간의 영혼은 슬픔 나무의 정원 바로 아래에 있는 심판대로 이동한다. 바로 그 심판대에서 세계의 인과율에 따라 천국과 지옥, 혹은 인간계로의 환생이 결정된다.
대다수의 인간이 자신의 슬픔을 선택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갔다. 그들이 심판대에서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는 슬픔 나무의 정원의 인도자였던 예랑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다지 관심도 안 갔지만.
아빠, 엄마의 소멸 이후 3천 년의 시간 동안 슬픔나무의 정원의 임무를 수행해 온 예랑이었지만, 자신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을 선택했던 인간의 영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그럼 타인의 슬픔을 선택한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아까 말했듯 그 영혼은 기회를 얻게 된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태인 자신의 육신이 누워있는 인간계로 돌아가 다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긴 세월을 인간계에서 천수를 누릴 수 있는 기회.
하지만 그런 기회를 누린 인간의 영혼은 그동안 예랑이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었다. 그래서일까? 예랑은 이번 중년 여성의 영혼도 그런 흔한 인간들처럼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네, 천사님. 저는 이 슬픔을 골랐습니다."
중년 여성의 영혼이 예랑에게 자신이 나무에서 골라온 슬픔을 건넨다. 예랑이 자신의 손에 올려진 그녀가 선택한 슬픔을 들여다본다. 바로 그때 예랑의 머리 위에 떠있던 천사의 고리가 깜짝 놀란 듯 깜빡거린다. 그녀가 선택한 슬픔은 예랑이 예상했던 그녀 자신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 슬픔은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왜인지 그것은 악마의 그것만큼이나 기괴한 모습이었고, 교복에는 진득한 피가 새빨갛게 묻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