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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Apr 11. 2024

Ep17. 돌아갈 기회




예랑이 이전보다 더욱 세게 힘줘 눈을 감았다 뜬다.

그러자 아래로 떨어지던 물방울이 거꾸로 올라가듯이 여학생의 슬픔 속에 머물러있던 예랑이 현실로 돌아온다. 다시 한번 자신의 눈을 가볍게 깜빡이자 슬픔을 보기 전 마주했던 중년 여성의 영혼이 눈앞에 그대로 서있다.

그녀가 봤을 때는 예랑이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인 것으로 보였겠으나, 그 깜빡임의 순간들에 여학생의 슬픔이 예랑의 안으로 깊게 들어왔다 이제 막 흩어진 것이었다.

 

‘타인의 슬픔을 선택한 영혼은 오랜만이라 그런가... 슬픔이 짙군. 짙어...’

예랑이 슬픔이 끝나 다행이란 듯 안도의 한숨을 몰아 내쉰다. 아직 등뒤에서 색색 숨소리로 잠을 이어가고 있는 예꼬 생각에 예랑이 그다음 해야 할 자신의 임무를 빨리 수행하기로 한다.


예랑은 자신의 손에 쥔 슬픔을 든 채, 아까 중년 여성이 거닐었던 그녀의 슬픔이 매달려 있는 슬픔 나무로 빠르게 날아 다가선다. 중년 여성이 멀찍이서 그런 예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예랑은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슬픔 나무 바로 옆 바닥에 쌓여있는 두터운 눈 형태의 빛 더미를 걷어낸다. 빛을 조금 걷어내자 정원의 바닥이 드러난다. 예랑은 그곳을 조금 더 파헤쳐, 마치 작은 새싹을 땅에 심듯, 자신이 쥐고 있던 그 여학생의 슬픔을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곳에서 분홍빛의 새하얀 두 줄기의 새싹 이파리가 서서히 고개를 들며 피어오른다.

 

‘너무 오랜만이네. 저 영혼처럼 타인의 슬픔을 선택하는 인간들이 많았다면, 이 볼품 없어진 정원도 아빠가 있던 그때의 울창한 숲처럼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 막 돋아난 분홍빛의 이파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예랑의 얼굴이 왜인지 쓸쓸해진다. 하지만 이내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중년여성에게 날아든 예랑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영혼을 낚아채 빠르게 날아 다시 정원의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 옆에 있는 거처 처마에 가만히 달린 풍경의 짤랑-소리가 예랑이 돌아왔음을 알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곳에 머물러 있던 수호령이 예랑과 중년여성을 마중한다. 예랑은 그런 수호령에 관심 없다는 듯 못 본척하며 빠르게 거처로 들어선다.

날개를 넓게 펼쳐 등 뒤 예꼬를 자신의 품으로 안아 든 예랑은 가만히 예꼬의 숨소리를 듣고는 예고를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눕힌다.

 

‘괜찮은 것 같네. 다행이야.’

예랑이 예꼬의 이마를 짚고,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려 다시 덮어준다.


“아기가... 잠만 자네요... 많이 아파요...?”

바로 그때 예랑의 등 뒤에서 중년 여성의 영혼의 소리가 들린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따라 들어왔는지 몰랐던 예랑은 그녀의 소리에 깜짝 놀란다. 그녀의 수호령이 급히 따라 들어와 그녀를 제지하려는 듯 거처 밖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열심히 해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뉘인 예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황급히 놀란 마음을 추스른 예랑이 그녀의 눈앞으로 자신의 거대한 날개를 펼쳐 그녀를 경계한다. 커다란 날개를 눈앞에 마주하면 놀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자신의 손을 앞으로 뻗어 괜찮다는 듯 예랑의 날개를 다독이듯 슬쩍 밀어내고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있는 예꼬에게 한걸음 더 다가선다. 그리고는 가만히 예꼬를 내려다보던 중년 여성의 영혼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 영혼에게서 눈물 형상의 빛의 방울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 빛의 방울을 미처 닦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 그녀의 눈물이 누워있는 예꼬의 이마에 떨어져 내린다. 예꼬는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없이 새근새근 작은 숨결을 내쉬고 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예랑이 그녀와 예꼬 사이를 다시 서둘러 막아서며 그녀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젓는다. 그녀는 더 이상 예꼬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선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돌변한 예랑이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낸다.

 

“어이 인간, 거기까지 하고. 피차 일이 있으니 좀 서두르기로 하지. 인간. 너는 슬픔 나무에서 너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을 선택했어.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너에게 기회가 하나 생겼어. 다시 인간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너는 남은 너의 삶동안 무탈하게 너의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될...”

예랑이 아직 자신의 불쾌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자신의 다음 임무를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니요. 저는 이대로 죽고 싶어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천사님.”

그런 슬픔 나무에 주어진 신의 규칙을 설명하던 예랑의 말을 끊으며 그녀가 답한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예랑은 다시 한번 당황한다.


‘아니, 이 인간은 참 특이하네. 아까 인간계 병실에서 이상한 명찰을 챙기는 것도 이상하고, 타인의 슬픔을 선택한 것도 심상치 않고, 그리고 뭐? 무려 신의 규칙으로 인간계로 돌아가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데... 뭐? 그냥 죽겠다고? 도대체 이 영혼은 뭐지? 너무 오랜만이 내가 이상한 건가, 하.’

예꼬 생각에 한시라도 빨리 이상한 영혼에 대한 임무를 마치고 싶었던 예랑이 할 말을 잃고 생각에 잠긴다.


‘어쩐다...?’

예랑은 이대로 저 영혼을 그냥 죽음의 심판대로 내려보낼지, 아니면 다시 한번 인간계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설명하고 의사를 묻는 게 맞을지 고민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당장 심판대로 보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고 말고 싶지만 왜인지 망설이게 된다. 아까 봤던 이 여성이 선택한 인간 여학생의 슬픔의 여운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타인의 슬픔을 선택한 영혼을 마주해서인지 예랑의 고민이 평소와 달리 길어지고 있었다.


그런 예랑의 눈에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떠다니고 있는 중년 여성의 수호령이 들어온다. 예랑은 그 수호령을 향해 자신의 천사의 고리를 번쩍이더니, 수호령을 강제로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긴다.


‘에휴... 어디 한번 보자고 인간. 도대체 얼마나 희한한 삶을 살아왔기에 신이 부여한 인간계로 돌아갈 귀한 기회를 그렇게 쉽게 걷어차는지 말야. 한번 보지.’

예랑이 자신의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수호령의 머리 부분에 올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러자 스스로 의식적으로 움직이던 수호령이 예랑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 자리에서 마치 하얀 돌이 된 듯 딱딱하게 멈춰 굳어버린다. 예랑의 빛의 고리가 새하얀 빛을 뿜어낸다. 그리고 잠시 후, 수호령과 맞닿은 예랑의 손길을 따라 중년 여성의 삶이 예랑의 눈에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조금씩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한다.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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