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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Apr 16. 2024

Ep18. 보통의 봄날이었을 뿐이었다.





예랑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그녀의 뒷모습이다. 눈을 감기 바로 전에 봤던 중년 여성 영혼의 뽀글 머리 그대로지만 얼굴은 영혼인 지금 보다 앳되보인다.

그녀의 뒷모습 너머 앞쪽으로 쾌청한 파란 하늘 햇살이 내리쬐고 있고, 하늘의 수평선에 맞닿은 드넓은 바다가 그 햇살을 반사하며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다. 따뜻한 바다만큼이나 잔잔한 파도만이 하늘과 바다 그 사이 언저리에서 고요히 넘실대고 있다.


짤랑-

어디선가 슬픔 나무의 정원 입구에 있는 예랑의 집 지붕에 달린 그것과 같은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처연하고 왜인지 쓸쓸하다. 파란 하늘, 끝없는 바다, 잔잔한 파도, 처연한 풍경 소리, 그리고 쓸쓸한 중년 여성의 뒷모습만이 고요한 바닷가를 채우고 있다.


그때 그녀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내든다. 돛단배다. 그녀의 거친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 크기의 신문지로 곱게 접은 돛단배. 그 돛단배의 돛대 윗부분에는 아주 작은 구멍이 나있고, 그 작은 구멍 틈을 노란 리본 줄이 동여매져 있다. 바람이 불자 돛단배 위 걸려있던 노란 리본이 길게 늘어져 휘날린다. 리본 위 새까만 작은 글자들이 보인다.


<세월에 잠겨도 널 영원히 기억할게. 사랑해.>

멍하니 리본의 글자를 바라보던 그녀가 반대쪽 손으로 아까와 다른 주머니를 뒤지더니 또다시 무언가를 꺼낸다. 명찰이다. 주황색 배경에 하얀 글자로 이름이 새겨져 있는, 교복 재킷에 옷핀으로 꽂는 흔한 명찰이다. 왜인지 떨리는 손길로 명찰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돛단배 위에 명찰을 살포시 겹쳐 올린다. 그리고는 신문지 돛단배가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거친 두 손바닥 사이에 올리고 가지런히 손을 접어 덮는다. 그렇게 잠시 손바닥 사이에 돛단배를 품은 채로 그녀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작은 기도를 올린다.


기도를 마친 그녀가 손바닥을 펼쳐 돛단배를 자신의 발치 코앞에 있는 바닷가 물 위에 살포시 얹는다. 왼쪽 두 번째 손가락으로 돛단배의 돛을 바다 쪽으로 살짝 힘주어 밀어 본다. 하지만 그녀가 서있는 방향으로 넘실대는 파도 때문인지, 아니면 헤어지기 싫어서인지 돛단배가 그녀의 속도 모르고 자꾸만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파도가 잔잔해지길 잠시 기다리던 그녀가 다시 한번 돛단배를 바다 위에 얹는다. 잔잔해진 파도 덕분인지 이번에는 돛단배가 무사히 눈앞의 넓은 바다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무지막지한 바다가 순식간에 사실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돛단배를 집어삼킬 줄 알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청량한 바다 바람에 돛에 달린 노란 리본이 길게 펼쳐 흩날린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이 노란 리본에 반짝이는 빛을 담아낸다.

리본 위 사랑해, 마지막 세 글자가 그녀의 눈에 닿자 꾹 참고 있던 그녀의 소리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그녀의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짤랑-

다시 한번 처연한 풍경소리가 울린다. 잔잔한 파도 소리와 어울린 풍경 소리가 멍한 바다 위 그녀를 다독이고 있다.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랑이 눈을 크게 깜빡인다.

그러자 그녀와 바닷가의 풍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녀의 옛 기억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예랑의 눈에 펼쳐진다.


***

      

“엄마!!! 나 오늘 아침 안 먹고 가!!! 점심에 배에서 햄버거 준대. 그럼 잘 놀다 오겠습니다!! 바바이!!!”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돼 보이는 풋풋한 얼굴의 여학생이 현관문을 활짝 열며 집안 거실을 향해 쾌활하게 소리친다. 그 소리에 주방에서 놀라 뛰어나온 중년 여성이 못마땅한 얼굴로 여학생을 째려본다.


“제주도까지 가는데 햄버거로 되겠어? 그것도 배 타고 가면 엄청 오래 걸릴 텐데? 그러지 말고 밥 먹고 가! 아빠한테 태워다 달라면 안 늦잖아!”

중년 여성의 낭랑한 목소리가 현관을 향한다.


“노우노우! 친구랑 같이 가기로 했단 말야. 아 맞다! 엄마 내 방에 나 교복 재킷만 갖다 줘. 장기자랑 때 입어야 하는데 안 챙겼다! 오 마이갓!!! 얼른얼른!!!”

그녀의 딸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어휴. 이놈 기집애. 어젯밤에 미리미리 챙겨놓으랬지? 기다려봐!”

중년 여성이 허리에 두른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딸의 방으로 황급히 뛰어들어가 교복 재킷을 찾아 건넨다. 그녀의 눈에 간당간당 옷핀으로 재킷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주황색 명찰이 보인다.


“근데 그거, 교복에 명찰도 그대로 가져갈 거야? 또 잊어먹으려고?”

그녀가 딸에게 묻는다.


“엥? 아! 음... 필요 없긴 한데, 빼기 귀찮으니까 그냥 가지 뭐. 가서 떼던가 할게! 늦었어 늦었어!! 그럼 이 딸내미는 진짜 갑니다요! 뿅!”


“핸드폰은 챙겼지? 도착하면 바로 연락하고! 잘 다녀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딸이 현관문을 쿵-닫고 사라져 버린다. 공허한 그녀의 목소리만 텅 빈 현관문 앞에 남는다.


“에휴. 정신없어. 나도 얼른 출근 준비해야겠다. 여보 얼른 준비해! 오늘도 나 태워다 줄거지?”

그녀가 현관에서 고개를 돌려 안방을 향해 소리친다. 그녀의 남편이 준비 됐다는 듯 차 키를 가볍게 흔들어 보인다.


그녀와 남편이 탄 차가 저층 아파트의 입구를 벗어난다.

그녀의 눈에 길가 가로수의 벚꽃잎들이 흐드러지게 휘날리는 게 보인다.

오늘은 유난히 따뜻한 봄날의 햇살과 분홍빛의 벚꽃이 잘 어울리는 날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봄날같은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그래, 그날은 보통의 봄날이었을 뿐이었다.

그저 평소처럼 지극히 평범했던.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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