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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Feb 13. 2024

3.와~ 완벽한 인수인계(완전 좋은데?)

#주 주사 이야기3




"뭐야뭐야?~ 박 주사~ 벌써 선임 노릇 하는 거야? 호호. 쉬엄쉬엄 해~ 우리 주 주사님 첫날부터 갈구지 말고. 호호!"


박 주사님의 옆 자리에 앉아 계신 고 주사님이 박 주사님과 나를 향해 소리치듯 말한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내 자리로 안내받은 박 주사의 앞자리로 향한다. 왜인지 박 주사가 씩씩대는 것 같다.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지만 그저 모른척하고 내 자리 의자에 조심스레 앉는다.


'후... 오늘날이 좀 덥나? 사무실도 좀 덥네. 정장 재킷을 벗어야 되나? 아냐. 공무원들은 튀는 걸 싫어할 거 같으니 그냥 입고 있자.'


다들 열심히 일해서인지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안에 열기가 얼굴을 벌겋게 달군다.


"주무관 주OO"

내 자리 모니터 위에 아주 귀여운 보라색이 칠해진 종이에 내 이름 석자가 적힌 명찰이 붙어 있다.

출근 첫날인데도 이런 센스 있는 준비를 해주다니. 좋소기업에 있을 때 관리부에서는 신입이 오든말든 거들떠도 안 보기 일쑤였는데, 우리 과 공무원들을 관리해 주는 <서무> 주사님의 따뜻한 호의에 감사하다.


우리 과에는 총 세 개의 팀이 있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맨 좌측 구석에 파티션으로 가려진 과장님의 자리가 있고, 그 옆으로 주무팀이라고 부르시는 1팀, 그리고 그 옆에 내가 속해있는 2팀, 그리고 그 옆으로 태극기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3팀. 그리고 각 팀에는 총 다섯 자리가 있다. 제일 큰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팀장님 자리, 그리고 팀장님이 바라보시는 앞, 좌우로 각각 두 명의 주사님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로 팀장님의 앞 좌측에는 고 주사님, 그 옆에는 내 사수인 박 주사님,

그리고 팀장님의 앞 우측에는 아직 뭔지는 모르겠지만 책임관님이라고 불리는 분이 앉아계시고,

그리고 그 옆이 바로 내 자리다.


나는 켜진 컴퓨터를 마우스를 움직여 이것저것 살펴본다. 제일 먼저 <올새>라고 하는 인트라넷으로 보이는 시스템이 보인다. 회사 자체 메신저도 있는지 옆에서 반짝 거린다. 신입 공무원 연수 때 대강 어떤 것들인지 배우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신기하다.

첫 느낌은 조직이 큰 만큼 분명 엄청 체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소기업에서는 이런 게 다 뭐야?

어디 되도않는 요상한 ERP시스템 갖다 놓고 되지도 않는 기능들 들이대며 매달 사용료 내는 거 아깝지 않게 "최대한 잘 활용하라"는 거지 같은 소리나 들었다. 이왕 돈 쓸 거면 좀 좋은 시스템을 대여하던가. 메일 용량도 좀만 쌓이면 바로 정리하라고 경고 뜨는 거지 같은 거 갖다 주곤, 용량 좀 늘려달라면 일 잘하는 직원은 그걸로 잘만 쓴다고 내 잘못이라 치부하기 일수였고


'대형 외국계 항공사면 뭐 하나. 결국 한국에서 운영하는 회사는 그 모양 그 꼴인 걸.'


"어이, 박 주사! 주 주사님한테 업무 분장 좀 알려주고 인수인계 기본적인 것부터 좀 해보지."


이전 회사가 떠올라 입안이 씁쓸해하고 있는데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에 나도 드디어 공무원으로서 업무를 배운다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 순간을 위해, 공무원 시험과목인 행정법과 행정학을 선택한 거 아니겠나? 행정직에 지원한 만큼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굳이 행정'법'과 행정'학'을 선택했었다. 생각보다 그 두 과목을 같이 선택해 시험을 치루는 공시생이 드물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다행히 운이 좋아 합격한 나는 드디어 배운 것을 실무에서 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호호. 살살해~ 박 주사. 주 주사님 첫날이라 긴장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주 주사님! 박 주사가 혼내면 저한테 이르세요. 내가 대신 혼내줄게, 호호!"


사람 좋아 보이는 고 주사님이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해준다. 처음으로 얼굴을 제대로 봤는데 박 주사님보다 앳되보인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것 같을 정도다. 그래도 7급이라고 했는데, 저 나이에 7급이면 도대체 언제 공무원에 임용된 건지 모르겠다. 바로 7급 임용시험을 봤을 수도 있고, 고졸로 바로 9급 시험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건 박 주사님이랑은 불편한 사이인 것 같다는 것.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자신의 상사여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도 이전 좋소기업에 첫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사수가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성이었다. 뭐, 군대 때문인지 나름 아르바이트 같은 사회생활을 많이 해서인지 사실 나는 나이가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회생활하는데 그깟 나이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냥 나보다 많이 알고, 나를 많이 알려줄 수 있으면 그게 사수지 뭐 그러고 말았다. 그게 내 정신건강에 좋았으니까.


물론 10년의 좋소기업 사회생활동안 짜증 나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면 그때의 나도 당연히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꼴랑 입사 좀 빠르다고 유세네." 생각했던 적도 많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게도 가면이 써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철저히 가릴 수 있게 된 사회성이라는 가면.

처음에는 가식적인 내가 싫기도 했지만, 그 가면 뒤에 숨으면 편해지는 걸 알고부터는 스스럼없이 잘만 뒤집어썼던 것 같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허허 웃어대는 여유까지 생긴 가면이었다.

그리고 고 주사님을 흘겨보는 박 주사님의 눈빛만 봐도 알 것 같다. 아직 가면이 다 씌어지진 않았다는 걸. 과연 단지 고 주사님이 박 주사님보다 어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난 지금처럼 말똥말똥 아무것도 모른다는 신입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만 깜박이면 되겠지.


모니터 너머로 내 앞자리 박 주사님의 눈치를 살핀다. 더워서인지 고 주사님 때문인지 계속 씩씩대고 계신다. 그러다 팀장님의 지시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게 분명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신입답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겨진 정장을 손으로 살짝 정리하고 박 주사님 옆에 가서 선다. 옆에 보조 의자가 있긴 한데 굳이 앉진 않는다. 앉으라는 말이 없었으니까. 왠지 공무원들은 이런 사소한 것도 불편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공문 모아놓은 거 보이시죠? 전년도 꺼 다 있으니까 보시면 될 거고. 더 필요한 건 법령 찾아보시고. 이게 이번에 팀 업무분장 공문이고요. 인수인계서는 메신저로 따로 보내드릴게요."

박 주사님이 자신의 모니터에 떠있는 새올 화면에서 이전의 공문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완전 좋은데?'

정말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업무 분장 문서를 팀장, 과장의 공문 승인까지 받다니.

거기에 인수인계서도 따로 정리해서 보내준다니.

거기에 사수가 바로 앞에 있어서 업무를 알려준다니.

와! 이렇게 완벽한 인수인계라니.


이전 좋소기업 업계에서는 통상 14일 정도를 인수인계 기간으로 허용하는 분위기였다. 뭐, 법적으로 딱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다녔던 외국계 항공사에서는 그랬다.

이직해 나간 선배들이 이직한 회사로 옮기기 전 그 정도 시간을 회사에 남아 다음 근무자에게 인수인계 해줬다. 이직한 회사에서도 14일이라는 시간을 고려해서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했다. 그렇게 통용되는 인수인계 허용 날짜는 14일.


그리고 그 14일이 지나면 전임자에게 당연히 연락해서 물어볼 순 없다.

다른 회사 사람이 된 사람에게 물어본다는 것도 우습고,

다른 회사 사람이 된 사람이 알려주는 건 더 우스운 일인 거니까.

돈 받고 일하는 프로는, 어찌 됐든 14라는 숫자가 지나면 알아서 해야 될 것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깨지든 박살 나듯.


그리고 아까도 말했든 ERP시스템은 말 그대로 중구난방 개판이어서 3개월 전 문서나 이메일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와. 공무원 시스템은 1년 치 공문서를 다 저장해 놓는다고? 아니 1년 치가 뭐야? 몇 년 치를 다 볼 수 있네. 그럼 이거 보면 1년 동안 이 조직에서 일어난 흐름을 쭉 알 수 있는 거고. 그렇게 1년 사이클만 잘 따라 해도 앞으로 해야 할 업무에 엄청 도움 되는 거 아닌가?


거기다 박 주사의 사수인 고 주사가 옆자리에 있고,

내 사수인 박 주사는 내 앞자리에 있다니.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보면 될 거 아냐?


거기다 인수인계서도 굳이 따로 만들어서 보내주겠다고?


와! 역시 공무원이 짱이다. 이렇게 체계적이라니.

역시 좋소기업 때려치고 큰 조직 오니 너무 좋다! 너무너무!


"아! 주 주사님, 내가 이거 알려드릴까요? 호호. 여기로 잠깐 와봐요. 그 재킷 안 더워요? 재킷 좀 벗고!"

박 주사님의 옆에 서서 대강 설명을 듣고 내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옆에 있던 고 주사님이 나를 부른다. 자신의 옆에 있던 보조 의자를 내 뒤에 받치더니 편하게 앉으라고 손짓한다. 내가 더워 보였는지 재킷을 벗으라는 친절까지 베푼다. 아까부터 더워서 벗고 싶었는데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벗으라고 하는 선임자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공무원은 정말 다 친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 주사님은 한참이나 나를 옆에 앉히고 이것저것 소개를 해준다. 특히 <호조>라고 하는 회계 시스템에 대해서 알려주는데 꽤나 복잡해보인다.


'일상경비랑.. 일반지출이랑.. 음...'

고 주사님의 입에서 처음 듣는 용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이전 회사에서 영업직이다 보니 사실 관리부의 업무인 회계, 재무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몰라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회사 업무란 건 그런거니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다. 그저 시간이 좀 필요할 뿐. 그 시간만 벌면 된다. 일은 어렵지 않다. 사람 간 그 시간을 버는 게 어렵지.


"벌써 식사 시간이네~ 주무팀! 오늘 국장님이랑 같이 식사하는 거 알죠? 준비하고. 아 맞다! 박 주사는 점심시간에 우리 주 주사님 식사 특히 신경 써주고. 첫날이니까~ 알죠?"


저 멀리 파티션 뒤에 앉아 계시던 과장님이 우리 팀을 향해 소리친다. 체구가 크지 않으신대도 저렇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확실히 권위가 느껴진다. 이전 좋소기업의 내 팀장이랑은 다르다.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배울 점이 있는 높은 분이 조직에 있다는 건 회사생활에 중요하다는 걸 나는 안다. 그나저나 신입 사원 밥까지 저 높은 분이 직접 챙겨주시다니.


'와- 역시나 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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