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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Feb 27. 2024

5.니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야.

#주 주사 이야기5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익숙한 발걸음으로 카페에 들어선 팀장님이 계산대를 향해 주문을 한다.


"아, 저는 카라멜 마끼아또요!"

메뉴를 고르기 위해서인지 잠시 망설이던 고 주사님도 팀장님 다음으로 주문을 한다. 막내인 나는 다음 순서인 박 주사님의 주문을 기다리며 아까 건네받은 주머니 속 팀비 하얀 봉투를 만지작 거리며 속으로 예상 금액을 계산해 본다.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4,500원에 마끼아또는 5,500원에... 아, 근데 팀장님은 이 더위에 뜨거운 걸 드시네. 얼죽아는 들어봤어도 뜨죽아는 또 오랜만이네.'

나는 괜히 전 직장 생각이 난다. 이전 직장에서 나를 많이 아껴주셨던 부장님 중 한 분이 스쳐간다. 그분도 더운 여름에도 늘 뜨거운 커피를 드셨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만두기 전에 물어보기나 할걸 싶은 아쉬움이 스친다.

나는 다음 주문을 기다리며 슬쩍 박 주사님의 눈치를 본다. 왜인지 아직도 메뉴판을 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뭐지? 오래 걸리시네. 드시고 싶으신 게 없으신 건가? 그럼 그냥 만만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여기에 생각이 미친 나는 숨간 움찔하며 박 주사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모습에서 왜인지 전 직장에서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전 직장에서 영업직으로 일했던 나는 거래처와 식사가 끝나면 으레 들리던 카페가 늘 불편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커피를 아예 안 먹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데, 왜인지 커피를 먹으면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고, 밤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커피를 멀리 하게 되었고, 거래처를 매일같이 상대해야 했던 영업직에게 이 건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습관처럼 식사 후 꼭 카페에 가서 꼭 아메리카노를 시켜야 하는 이들이었으므로.


나도 처음에는 거래처를 상대하는 영업직의 본분에 집중하자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들처럼 '아아'를 주문했다. 물론 한 모금도 먹지 않고 고대로 다 버렸지만. 그러다 연차가 좀 쌓이고 거래처 직원들이 익숙해지고부터는 여유가 좀 생겨서인지 그래도 내가 마시고 싶은 걸 고르자는 생각이 들어 커피 대신 차 종류를 먹었다. 허브차, 자몽차, 레몬차, 그리고 생강차까지.


그 생강차를 먹었던 날, 나는 당시 내 팀장님한테 혼났다.

아니, 개 털렸다.


"어떻게 영업직원이 거래처 앞에서 생강차를 쳐마실 생각을 했냐? 대가리에 뭐가 들었냐?"

뭐, 그랬던 것 같다. 입에서 생강차의 생강 냄새가 난 게 문제라고 지적했던 것인데,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생강 냄새 때문에 거래가 안 될 거였으면, 그게 아니어도 안될 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거래처와의 계약은 순조로웠고, 딱히 문제 되진 않았다.

그저 팀장이 화가 났고, 나는 그 화를 오롯이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을 뿐이었다.


'그 팀장은 왜 항상 그렇게 내게 화를 냈던 걸까?'

전 직장에서의 일이 한번 떠오르니 괜히 억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한 번은 그 팀장이랑 거래처 직원과 점심 식사를 하며 미팅을 하고 있었다. 팀장은 함께 있을 때 내가 말을 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김치가 먹고 싶은 거다. 그래서 김치를 먹으려고 젓가락을 뻗었다. 그런데 제일 위에 포개져있는 김치는 뻣뻣하게 말라 보였다. 나는 국물에 적셔진 촉촉한 김치가 먹고 싶어서 그 제일 위 마른 김치를 살짝 걷어내고 아래 김치를 집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김치를 향해 내리치는 불벼락,


"그건 반칙이지!"

팀장이 정색한 얼굴로 내 손을 '탁'치며 말했다. 내 젓가락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와, 그때 순식간에 싸해진 테이블의 분위기란.


'촉촉한 김치 먹으려는 게 왜 반칙이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데, 거래처 직원이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그럴 수도 있죠 뭐 하고 나를 다독였다. 팀장의 반칙이란 말은 조금 기분이 언짢은 정도였지만, 거래처 직원의 그 위로는 내게 큰 상처로 남았다.

김치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 먹게 하는 이 상황이 정상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정장 재킷 속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직장인들이 각진 정장을 입는 이유는 재킷 안 주머니에 사표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사표를 내진 못했다. 고작 김치를 못 먹게 했다는 이유로 사표를 낼 순 없었다. 나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한낱, 흔하디 흔한, 회사의 부품 하나인 직장인에 불과했으니까.


괜히 전 직장 생각에 마음이 공허해진 나는 박 주사님을 향해 눈길을 옮겨본다. 빨리 메뉴를 골라야 할 것처럼 불안해하는 눈빛과 쫓기듯 어버버 하는 입술과 표정을 보고 있자니 생강차 따위를 주문해서 욕쳐먹었던 그때의 나도 딱 저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제가 먼저 고를까요? 음... 사장님 여기 뭐가 맛있어요?"

나는 박 주사님 옆에 살짝 다가서며 카페 직원에게 살갑게 말을 붙여본다. 최대한 박 주사님이 자신의 순서를 뺏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럴 때는 전 직장에서의 영업 경력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 행동에 박 주사님은 순간 움찔했지만, 내가 카페 직원과 대화를 이어가자 박 주사님의 표정이 한결 풀린 게 눈에 보인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어 내 의미 없는 질문에 카페 직원이 세심하게 메뉴를 추천해 준다. 아무래도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카페는 공무원들이 먹여 살리는 카페라는 걸. 카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모두가, 공무원이 분명해 보였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공무원의 패션 스타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전 직장에서 배운 것 중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직원과 말을 하면서도 계속 박 주사님이 결정을 내렸는지 눈치를 살핀다.


"아, 정말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음... 저는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할게요."

카페 직원에겐 미안하지만, 내 답은 이미 아아로 정해져 있었다.

참 웃긴 게, 전 직장에서는 그렇게 안 넘어가던 커피였는데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공시 준비를 하며 나는 커피를 먹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먹는 정도가 아니고, 생맥주 따라먹는 500cc 잔에 얼음 가득 채워 매일 세 잔씩 먹어 재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당연히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했고,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던 내게 커피는 사랑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커피 맛을 알게 되었고, 이전 직장에서 커피 대신 마실 걸 늘 불안하게 찾아 헤맸던 그때 그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저는 자몽에이드로 할게요."

내 아아 주문에 잠시 흠칫 놀라던 박 주사님이 마침내 주에 성공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카라멜 마끼아또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자몽에이드 하나. 총 네 잔 맞으시죠? 이쪽에서 계산해 드릴게요."

카페 직원이 자신의 친절한 설명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위나 고른 나를 향해 원망스럽다는 듯 도끼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팀비를 꺼내 계산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커피는 내가 사지."

바로 그때 내 앞을 막아서며 팀장님이 말씀하신다.


'밥은 팀비로 냈으니 커피는 본인이 쏘겠다니. 우리 팀장님 센스 있으시네.'

은근 기대했지만, 막상 쏘겠다는 팀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괜히 공무원이란 직업이 더 멋지게 느껴진다. 이전 직장에서 모셨던 팀장님은 점심 식사는 법카로 결제하면서 자신의 사비로 사는 것처럼 큰소리 떵떵 치고, 그다음 커피는 거래처가 사거나, 아니면 그냥 어딘가로 쏜살같이 도망가기 일쑤였다. 팀장이 매일 커피를 산다는 게 부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나중이었다. 당연히. 나는 팀장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팀장의 사정까지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박 주사님이 어느새 테이블 자리를 맡고는 앉아있다. 가만 보니 박 주사님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를 맡고도 혹시 자신이 맡은 자리를 못 찾아올까 봐 저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앉아있는 티가 나는 걸 보면 말이다. 왜인지 표정은 아까 밥 먹을 때부터 계속 좋지 않지만.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볼 생각은 없다. 어차피 같은 조직에서 부대끼며 조금 지내다 보면 알기 싫어도 다 알게 될 것이므로. 대충 짐작은 가지만.


잠시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니 주문한 음료가 쟁반에 담겨 나온다.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계산대 한편에 있는 냅킨과 빨대를 챙긴다. 세팅을 마치고 쟁반을 들어 테이블로 향한다. 역시 능숙한 손짓으로 쟁반 위 음료를 하나씩 주문한 분 앞에 맞춰 내려놓는다.


"응? 주 주사 고마워! 근데 이건 뭐야? 빨대에 비닐이 남아있네."

왜인지 화들짝 놀란 팀장님이 내게 말한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순간 몸이 굳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우리 팀장님 왜 이러실까? 빨대 입에 닿는 부분이 더러워질까 봐 요기만 남겨놓으신 거잖아요. 우리 주 주사님 섬세하신 것 좀 봐~ 센스쟁이시네, 정말!"

고 주사님이 팀장님을 향해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빨대 세팅을 했다. 내겐 너무 당연했던 빨대 세팅이라 미처 몰랐는데, 막내만 8년을 하고, 거래처 영업 미팅을 하루가 멀다 하고 하다 보니 생긴 습관이었다. 공시 준비하는 1년 동안 하지 않았음에도 왜인지 몸이 익숙하게 기억하다니 새삼 놀랍다. 나는 멋쩍은 듯 한번 웃고 자리에 앉는다.


"근데 주 주사님~ 그 반지는 뭐예요? 에이~ 결혼반지죠 그거?"

"아기는요?"

"집은 근처세요?"

"출퇴근은 어떻게 하세요? 차는 있으세요? 여기 주차장에 직원이 차 대는 거 댓수 제한 있어서 제가 서무 주사님한테 여쭤봐 드릴게요~! 호호!"


자리에 앉기 무섭게 고 주사님이 나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낸다. 아까 분식집에서 밥 먹을 때만 해도 내가 속한 이 팀이 대화가 없는 엄청 조용한 팀인 줄 알았는데, 거의 래퍼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고 주사님의 질문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는 아아를 긴 호흡으로 쭈욱 빨아 마시는 것으로 정신을 다잡고 차분하게 대답을 시작해 본다.


"결혼반지예요. 비싼 건 아니고요. 하하."

"아기는 아직인데, 이제 슬슬 가져볼까 하고 있고요."

"집은 차로 10분 정도 걸리더라고요. 다행히도."

"차는 전 직장 퇴직금 좀 써서 신형으로 뽑았어요. 아내 덕이죠 뭐."

"아, 직원이면 다 댈 수 있는 게 아니군요? 알아봐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정 안되면 다른 방법 찾아보면 되니 너무 무리하진 마시구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고 주사님."


다행이다. 1년 동안 공부만 해서 대화한 사람이라곤 아내밖에 없어서 내심 말을 잘 못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대답이 술술 나온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내가 한 대답이 빠르게 머릿속에 다시 떠오르며 혹시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까지 자연스럽게 되새겨진다. 이것도 전 직장에서 영업 미팅을 하도 다녀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에 입안이 씁쓸해진다. 굳이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과묵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해 내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는데.


"근데 전 직장은 왜 그만두셨어요? 그 나이에 9급으로 들어오시면 월급도 엄청 적어지실 텐데 굳이?"

고 주사님이 이전 질문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명랑하게 내게 묻는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막상 적나라하게 대놓고 물어오니 조금 당황스럽다.


"쿨럭. 쿨럭."

내 옆에 앉아 자몽에이드를 길게 빨아들이던 박 주사님이 갑작스레 기침을 한다. 아무래도 고 주사님의 방금 전 질문 때문인 것 같다. 애써 아닌 척하려 노력하곤 있지만.


고 주사님의 전 직장을 왜 그만뒀냐는 물음에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까 잠시 고민이 된다. 내가 전 직장을 그만두고, 고 주사님 말대로 월급도 반토막, 아니 그 이상 난 9급 공무원이 된 이유를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이 돼 잠시 머뭇거린다.


"안정적이잖아요. 잘리지 않고. 그 정도면 저는 좋겠더라고요. 아니, 그 정도만 해줘도 말이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데 말이죠. 그리고, 저도..."


회사라는 조직에서 너무 깊은 속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젠 잘 알기에 그저 흔히들 생각하는 공무원의 장점을 이야기한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려고 했는데, 가족을 지킬 수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딸려 나온다. 더 이야기를 하면 내 마음속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서둘러 아아를 빨대로 들이마셔 입을 틀어막는다.


내가 전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당연히 힘들어서다. 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외국 국적 항공사에 다녔다. 물론 외국 본사가 아닌 한국 지점에 다녀서 말만 외국계 항공사지 한국 좋소기업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러다 지금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코로나에 때려 맞았고, 다들 예상할 수 있듯이 항공사, 여행사는 코로나의 영향을 직격으로 때려 맞았다. 자연스레 인원 감축이 시작되었고, 처음 입사해 막내 때부터 함께 고생하고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하나둘 떠났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조금 더 나은 곳을 찾아 제 발로 나갔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잘려나갔다. 회사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자르고 또 잘라냈다. 회장을 비롯한 임원급은 평소처럼 늘 인자한 웃음을 보여줬지만, 정리 해고를 담당한 외부 컨설팅 업체는 그들의 그런 웃음을 비웃듯 매일같이 칼날을 휘둘러댔다. 나는 운 좋게도 정리를 당하진 않았다. 다만, 정리를 당한 내 옆, 내 앞, 내 뒤에 앉아있던 동료라 불렸던 이들의 업무도 모두 내가 도맡게 되었다. 힘들었다. 하지만 힘들다 말할 수 없었다.

힘들다고 하면,

"그럼 그만둬. 너 아니어도 할 사람은 많거든." 라거나,

"조금만 버텨. 이 위기에도 니가 회사에 남으면 언젠가 너한테 좋은 일이 있을 거니까."였다.


회사는 늘 그런 식이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만 들었고,

늘 지긋지긋하고, 늘 교활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해 회사에 남은 이들은 침몰하는 배 같은 회사에 갇힌 채 선택을 해야만 했다.


매일같이 고민했다.

떠나야 하나, 버텨야 하나.


난 우선 버텨보기로 했다.

결혼을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고 싶었고, 언젠가는 사랑하는 내 아이도 만나고 싶었다.

내 눈엔 남들은 참 쉽게 잘만 사는 보통의 삶 같았는데, 그걸 이루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을 벌려면 이 회사에서 버텨야 한다고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자 전부라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고 버티던 어느 날, 회사는 남은 직원들을 향해 코로나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돌아가면서 무급 휴직을 쓰라고 통보했다. 그렇게 남은 직원들은 한 달, 두 달씩 돌아가면서 월급을 받지 못한 채 강제로 쉬어야 했다. 무급 휴직이 싫다면 사표를 써도 좋다고 했다. 회사는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늘 교활하고,

그렇게 늘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그렇게 점점 나빠졌다.

이런 내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아내가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 했지만 내 눈에 그것은 고통이었다. 회사 눈치 보느라 자정이 다돼서 집에 오면 아내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본인은 괜찮다 미소 지었지만, 맞벌이를 하며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는 아내를 마주하는 것이 내겐 너무 고통이었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그래, 더 나은 삶은커녕, 흔한 보통의 삶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못난 가장인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오늘도 힘들었지 오빠? 먼저 자. 나 이것만 좀 더 보고 자려고."

충혈된 눈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아내의 말은 고통이고, 슬픔으로 남았다.

그렇게 몇 달을 이어갔고, 안타깝게도 아내는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와 고통 속에 갇힌 나, 둘 모두에게 슬픔이 남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무급 휴직을 써야 하는 차례가 되었다. 강제로 쉬게 된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배달을 할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내게 웃어 보이는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도 갑자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날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났고, 새벽 1시에 잠들었다. 국어, 영어, 한국사, 행정법, 행정학. 공무원 시험 5가지 과목의 이론서와 기출문제를 적어도 10번 이상 봤다. 10 회독쯤 하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그 자신감이 전 직장에 사표를 내게 했다. 사실 나는 공무원 시험에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큼 독하게 한 사람이 떨어지면, 이 세상 누구도 붙을 수 없는 시험이라는 독이 가득 올라 있었다.


그렇게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공무원이 돼서 너무 행복해요. 꿈을 이룬 기분이에요."

분명 고 주사님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내가 말했지만, 나 자신에게 한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옥으로 침몰하는 배였던 전 직장을 나와서, 나와 나의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보통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내게 행복이었다.


"딱 1년. 아니, 한 달, 아니 일주일만 지내보세요. 당장 전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질걸요."

아직 내가 한 꿈같은 말이 테이블 위에 머물러있는데, 박 주사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는다. 나는 당황했지만 당연히 티 내진 않는다. 내 속마음을 감추는 것쯤이야 이제 내겐 일도 아닌 게 됐다. 연차가 쌓인 흔한 직장인들이 다들 그렇듯이.

나는 박 주사님의 말 뜻이 궁금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뭐야 뭐야~ 박 주사는 늘 이런 식이라니까. 그러니까 민원인한테 그렇게 눈두덩이나 얻어맞고 다니는 거야. 눈치 없이 대화 맥락을 뚝뚝 끊어버리잖아. 참나~ 주 주사님! 박 주사 말 듣지 마요! 딱 10년. 그래 10년만 참아요! 공무원 괜찮아요! 난 좋던데. 안정적이고 얼마나 좋아? 9급은 좀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10년 정도만 참고 다니면 7급만 돼도 사람 취급받을 거니까요! 하여튼 박 주사, 진짜 이상하다니까~"

싸늘해진 테이블의 공기를 바꾸려 고 주사님이 넉살 좋게 말한다.


10년이라. 10년이면 내 나이가 50살인데 그때서야 사람 취급을 받을 거라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그리고 합격해서 공무원이 돼서는 더욱 그럴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직 공무원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서글퍼진다.


박 주사님의 표정이 오늘 본 것 중 제일 심하게 구겨져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전 직장에서 내 신입 시절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박 주사님을 향해 고 주사님이 말한 이상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내 생각에 이상한 건 박 주사님이 아니라 나인 것 같은데. 늦은 나이에 9급 공무원이 됐다고 이렇게나 행복해하는 내가 이상한 거 아닐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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