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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Mar 12. 2024

7. 70세 어르신

#주 주사 이야기7




"주 주사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도장받으셨죠? 갖고 오세요."

초록색 막대 도장을 서랍에서 꺼내 손에 움켜쥐고 박 주사님 자리로 향한다. 신규 오리엔테이션 때 공무원 임용을 축하한다며 이것저것 기념품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 초록 도장이었다. 처음에는 이 초록색 기다란 물건이 뭔지 몰랐다. 아래 뚜껑을 열어보니 인주를 발라 찍는 도장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장이라...'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아니, 내 삶에서 도장을 썼던 적이 있었던가? 요즘 시대에도 도장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 아니, 공무원이 되었는데 왜 도장을 축하한다며 주는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박 주사님이 도장을 갖고 오라는 말에 혹시 공무원 업무를 볼 때 도장을 쓸 일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주 주사님, 여기는 저희 상반기에 일 봐주신 기간제 분이세요. 하반기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주유 전표 끊는 건 앞으로도 주 주사님이 하게 되실 거라 그냥 인계해 드릴게요. 그냥 보시고 똑같이 하시면 돼요."

박 주사님이 노란 형광 조끼를 입은 어르신을 소개해주신다. 머리는 이미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듯 새까맣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제가 오늘 처음 와서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르신의 굽은 허리보다 조금 더 내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건넨다. 전 직장에서 영업을 다니면서 나는 만나는 모든 거래처 분들에게 언제나 90도 인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영업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도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예의 바른 영업맨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 영업 커리어나, 당시 '우리 회사'라 불렀던 적 직장에 그렇게 도움이 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저, 습관이었나 보다 싶다.


"아, 아닙니다... 주사님.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허허."

내 90도 인사에 어르신이 과도하게 놀란 기색을 비치신다. 굽혔던 허리를 다시 곧추 세우는 동안 직감적으로 어르신이 많이 놀랐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왜 이렇게까지 놀라시는지 궁금해진다. 나보다 연배가 적어도 2-30년은 더 돼 보이시는 분께 이런 인사가 과한 건 아닐 텐데 하는 의심이 든다. 나는 오늘 처음 출근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싶은 생각에 박 주사님의 눈치를 살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내내 나를 불편한 시선으로 대하던 박 주사님의 눈빛이 스친다.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지만, 여지없이 드러나는 불편하다는 기색.


"얼마나 필요하세요?"

박 주사님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어르신께 묻는다.


"아... 예... 10리터 찍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반장님이..."

어르신이 어려워하는 목소리로 박 주사님께 답한다.

둘의 대화를 중간에서 가만 보고 있자니 나이로 따지면 반대의 상황이 벌어져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이 어린 박 주사님이 연세 지긋한 어르신께 저렇게 대할 수 있다는 건, 역시나 둘 사이에 '돈'이 걸려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잠깐의 눈치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돈'으로 지위가 선명하게 나눠져 있는 갑, 을 관계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게 보인다.


"주 주사님 여기 주사님 사인하시고, 이렇게 도장 세 번 찍으시면 돼요. 그다음은 반 접어서 찢으신 다음... 어르신, 여기요!"

박 주사님이 양면에 똑같은 글자가 적혀있는 노란색 주유 전표 오른쪽 면을 아무렇게나 찢어 어르신께 건넨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주유 전표에 나는 조금 놀란다. 초등학교 때나 썼던 미농지 같은 비닐 같은 종이를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주유 전표라니. 저 전표를 갖고 주유소에 갖다 주면 기름을 넣을 수 있는 그런 바우처 같은 건가 보다 싶다. 전 직장에서는 영업차를 자고 아무 주유소나 가서 기름 넣고, 법카로 쓱쓱 긁거나 개인카드로 긁은 다음에 영수증만 관리부서에 전달하면 그만이었는데,


'공무원들은 주유도 이런 식으로 하나 보네... 관리하는 사람도, 전표를 사용하는 사람도, 거래처인 주유소도 이런 식으로 하면 비효율적일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하는 건 역시 확실히 해야 하는 뭔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인 건가? 흐음...'

박 주사님의 도장이 세 군데 찍힌 노란 주유 전표를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사기업에서 공무원 조직으로 이직하면서 효율을 운운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했지만, 막상 노란 주유 전표를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빡빡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네... 감사합니다 주사님... 그런데... 혹시 저 하반기에도 일이 좀 있을..."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된 양 노란 전표를 살펴보고 있는 내 귀에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형광 조끼 어르신이 박 주사님께 말을 건넨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요. 공고 나면 홈페이지 올라갈 거니까 거기서 확인해 보세요."

어르신의 질문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세상 관심 없는 투의 목소리로 박 주사님이 답한다. 어르신께 조금만 더 친절하게 말하면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지만, 그런 내색을 감춘다.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 온 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관계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는 걸 전 직장에서 여실히 느꼈던 나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주사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 주사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어르신의 목소리에 슬픈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다. 박 주사님은 그런 어르신의 말에 쳐다도 보지 않고 무심한 손길로 남은 노란 전표 뭉텅이를 모아 책상에 탁탁 친다. 그만 볼 일 끝났으면 가보라는 뉘앙스가 여실히 느껴진다.


그런 박 주사님의 모습을 보던 어르신이 뒤 돌아 사무실 문밖으로 향한다. 나는 그런 어르신의 뒤를 따라가 사무실 문을 열어드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드린다. 전 직장에서 몸에 익은 습관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다. 출근 첫날부터 나대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이렇게 불쑥불쑥 나오는 내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래도 70세는 훌쩍 넘어 보이는 어르신을 배웅해 드리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 왜인지 처음 인사할 때부터 마지막까지 본인보다 훨씬 어린 나를 어렵게만 대하시는 어르신께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조심히 들어가시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것도 습관이네, 습관...'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전 직장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이 내게 생각보다 짙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기간제 어르신이라...'

기간제 일자리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전 직장 경험 상 아무래도 계약직 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세가 지긋하신 걸 봐선, 아마도 어르신 분들 일자리인가 싶다.


"예산으로 노인들한테 일자리 주는 게 맞다고 보냐? 내가 낸 세금을 왜 그렇게 쓰는 건지 쯧."

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상사 분께서 모닝커피를 하며 하셨던 말이 스쳐간다.


'그때 뭐라 그러셨더라... 젊을 때 아무 노력 안 하고 나이만 먹어서 능력 없는 노인들을 나라가 어디까지 먹고살게 해줘야 하냐고 하셨었던가...'

전형적인 서울 한복판 삐까뻔쩍 유리창 빌딩 숲에 출근하는 직장인의 불만 그대로였다. 자신은 나이 들어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목소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굽은 허리를 더 굽혀가며 공무원이 된 나를 연신 어렵게 대하는 어르신을 봐서인지 그때 그 상사 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예산을 써서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맞냐는 상사 분의 그 혼잣말에 당시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런 건 모르겠고, 내 월급에서 매년 오르는 건강보험료나 좀 덜 내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 했던가. 그것도 한 0.3초 아주 짧게.


그런데 노란 형광 조끼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새까만 얼굴로 나보다 더 90도 넘게 허리를 굽히시는 어르신을 직접 보고 나니, 어르신 분들께 예산을 써서라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제공해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상사 분의 말처럼 맞냐 안 맞냐의 문제가 아닌, 살 수 있게 해 드리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본인이 원하지 않았을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포함돼버린 그들에게 어쩌면 우리 사회는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

왜냐하면, 언젠가 나도 저 어르신처럼 힘없고 어려울 때가 올 테고, 그때가 됐을 때 이 사회가 '더 이상 늙다리인 댁은 필요 없으니 알아서 각자도생 합시다!' 하고 손절 한다면, 그동안 그래도 이 사회에서 세금 따박따박 내며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이 통째로 불쌍해질 것 같아서. 이것밖에 안되는 세상이 한 스러울것 같아서.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저 어르신처럼 이 사회에서 노인이라 불리는 날이 올테니까.


마냥 좋을 것만 같았던 공무원으로서의 첫날이 한순간 적적해진다.

그런 기분을 떨치고자 사무실 유리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선다.


"주사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안쪽으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박 주사님이 나를 부른다. 어르신을 배웅한 게 새로운 조직의 첫날 신입이 너무 나댄 건가 싶은 궁상맞은 걱정이 든다.


"노란 전표랑 이거 주사님 도장 챙겨가시고요. 전표는 모아놓으셨다가 매달 거래 주유소랑 정산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냐면요..."

내 걱정과 달리 박 주사님은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주유소 정산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신다. 아까 미농지 재질로 된 노란 전표를 봤을 때도 깜짝 놀랐는데, 박 주사님이 책상 한편에서 꺼낸 파란 판 표지를 실로 묶은 정산정리 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내가 초등학생 회의록 때나 썼을 법한 파란색 실 묶음 판을 요즘 같은 시대에도 쓴다는 게 충격이다. 더 충격적인 건 그런 회의록 같은 판 수십 개가 박 주사님 옆 캐비닛에 가득 들어있다.


'분명 옆에 컴퓨터도 있는데... 사양도 좋아 보이는데... 굳이 이렇게 일일이 실로 묶어가며 파일로 남긴다고? 주유 전표가 이렇게나 중요한 거야?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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