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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Mar 05. 2024

6. 우와! 태극기!

#주 주사 이야기6




"왜 이렇게 늦게 와? 빨리빨리 교대해 줘야지. 참내..."


능숙한 자세로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다른 한 손에는 가지런히 접은 정장 재킷을 손에 든 채 사무실에 들어선 내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첫날이지만 언제 봐도 뿌듯한 내 이름 세 글자가 반짝이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내 자리에 앉으며 슬쩍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본다. 오늘 오전 과장님의 소개로 잠시 인사를 나눴던 3 팀장님이다. 아까 악수를 할 때 자신만만한 악력이 인상적이었던 분이다. 이전 직장 다닐 적에 회사 안 사람들은 물론, 거래처 사람들과 수도 없이 악수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잠깐의 악수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짐작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3 팀장밈의 악수에서 단단한 자신감이 묻어났던 기억이 난다.


3 팀장님의 말에 왜인지 우리 팀은 다들 불편한 표정이다. 교대라고 말한걸 보니 아마도 식사를 마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린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팀별로 식사를 하고 오는 눈치다.


"그러게요. 카페까지 갔다 왔어? 참.. 팀장님 얼른 식사 가시죠."

3 팀장님의 자리 우측 편에 가까이 자리 잡은 7급 주사님이 대화를 잇는다. 넌지시 우리 팀, 정확하게는 박 주사님을 째려보는 것 같다. 박 주사님은 그런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러신 건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다.


"흠흠. 가지."

불편한 내색을 비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3 팀장님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구석 벽에 건다. 괜한 호기심이 난 나는 그 물건을 살펴본다.


'태극기?'

빨갛고 파란 물결이 가운데서 웅장하게 휘몰아치고 있는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태극기를 멍하니 한참 바라보던 나는 괜히 가슴이 저릿해온다.


'전 직장에서는 다른 나라 국기가 걸려있었는데... 태극기라니. 너무 좋다... 정말...'

가슴속 저릿함이 뿌듯함으로 바뀐다.


나는 외국계 항공사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무실에는 그 나라 본사의 국기가 걸려있었다. 나는 태극기 걸어놓는 게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줄 알았는데, 일본보다 더한 나라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처음에는 좋았다.

한국인이지만, 왠지 우리나라보다 잘 나가는 나라의 국기를 매일 보며 출근한다는 게 신났다.

그리고 가족, 친구, 친척들도 "올~ 외국계 항공사에서 일한다고? 멋진데?" 라며 모두 부러움의 눈길을 반짝였으니까.

"근데 그럼 나 항공권 좀 싸게 줄 수 없냐?"

꼭 이 말이 들러붙는다는 건 아쉬웠지만.


아무튼 그렇게 신입 시절을 지나고, 2년, 3년쯤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그런 내 속내를 은근히 그래도 회사에서 '동료'라 믿었던 상사분들께 내 보였을 때 그들은 내게 '3, 6, 9년 차에 꼭 회사 때려치우고 싶어질 때가 와. 그래서 그때쯤 회사에서는 승진이라는 먹이를 내려주지. 선택은 니 몫이야. 3, 6, 9에 맞춰 때려치우던가, 아니면 승진이라는 당근 먹고 더 달려가던가.'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말대로 3, 6, 9년의 당근을 받아먹고는, 10년째 때려치우고 그곳을 나왔다.

그 3, 6, 9년 세 번의 당근을 먹는 동안에도 늘 마음속은 찝찝했다.


'나는 왜 다른 나라 국기를 보며 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그 회사의 당근을 그만 받아먹고 당당히 때려치우고 싶은 핑계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외국계 항공사에서 10년을 일하면서 느꼈던 건,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치.

두유노우킴취?

두유노우싸이?

아니, 요즘은 싸이 아니고 비티에쓰?

아, 요즘은 비티에쓰도 아니려나.


어딘가에선 이 나라 한국이 세계 속에서 뭐라도 되는 듯 자화자찬 떠들어대고,

그 자화자찬에 국뽕이 어깨 끝까지 뽕뽕하게 차오른 나 같은 한국인들은 내 삶이, 이 한국에서 사는 삶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내 앞 뒤 옆 위아래 모두 그렇게 사는 것 같으니,

그래도 두유노우 K-뭐 하면 있어 보이는 것 같으니 다 괜찮은 거겠지 하고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외국계 항공사, 내 첫 직장이자 전 직장이었던 그곳에서 내가 느꼈던 한국의 위치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어릴 적에는 홍콩, 일본,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이라고 해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니 어쩌고 했지만, 내가 일했던 항공사의 본사에서는 한국의 위치를 그 네 마리 용 중 제일 아래로 보는 것 같았다.


본사와 떨어진 위치상 아시아의 통합 컨트롤타워는 홍콩에 있었고, 재무 회계 및 특수 사업에 대한 컨트롤을 싱가포르에 위치했다. 한국과 일본을 담당하는 본사매니저는 당연하다는 듯 일본에서 생활했고, 나와 같은 한국 직원들은 매주마다 일본의 매니저들에게 시장 상황 등을 보고해야 했다.


신입 때는 아무 생각 없었으나, 사내에서 짬이 좀 차고 직급이 좀 올라갈수록 내가 느낀 한국의 위치는 참 별거 없었고, 일본을 비롯해 홍콩, 싱가포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보고를 해야 하는 건 참, 별로인 일이었다.


더 별로인 건, 그 회사에서 나처럼 알 수 없는 별로의 굴욕감을 느끼는 직원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홍콩, 싱가포르, 일본, 더 나아가 본사의 직원에게 잘 보여서 해외 본사로 가서 일할 수 있을지 눈치 보는 직원들이 태반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같은 한국인의 등에 칼을 꽂는 것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직원들이, 너무 흔했다.


그러다 보니 더 그랬던 것 같다.

아침 출근해서 한국인임에도 다른 나라 국기가 눈에 자연스레 스치고, 다른 나라 언어로 콘퍼런스 콜로 일본, 홍콩, 싱가포르에 보고를 해대고, 본사 해외 발령을 위해 동료를 찍어 누르고. 그리고 그 모든 걸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눈을 깜빡이며 사는 사람들.


그것은 왜인지 점점 내게 슬픈 일이 되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나임에도.


'나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걸까.'

그런 고민이 흔해지던 날들이었다.


괜히 전 직장에서의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자 눈앞에 벽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취업률, 출산율 그리고 모든 게 다 개차반이라고 욕먹는 한국이지만, 그래도 한국인이어서 그런가, 드디어 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 10년의 세월을 다른 나라에 굽신 거리며 살았던 내겐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조오금, 삐딱하게 걸려있는 게 걸리긴 하지만...'

식사 전 마음이 급하셨는지 3 팀장님께서 걸어놓은 태극기의 나무틀 액자가 살짝 비뚫어져있다. 마음 같아선 벌떡 일어서 태극기의 중심을 딱! 맞추고 싶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직장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걸 굳이 나서서 한다는 게 꼭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나도 알게 된 것 같다. 전 직장에서 시작했던 신입의 그때와는 많이 다르게.


따르릉-

내 앞에 전화기에 빨간불이 반짝이며 전화가 울린다. 순간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어 올릴 뻔했다.


'이것도 습관이네... 그래도 일 쉰 지 1년도 넘었는데 말야.'

전 직장인 항공사에서는 무엇보다 속도가 생명이었다. 아니, 생명까진 아니고 '돈' 정도라고 해야겠다. 항공기 이륙시간에 맞춰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맞춰야 하는 업무 특성상 전화벨은 한번 이상 넘기지 않고 받아야 했고, 그 내용도 두 번 이상 손이 가지 않게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그때의 특성이 몸에 배어서인지 나는 눈앞에서 울려대는 전화를 받아야 하나 순간 움찔하게 된다. 물론,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 첫날이니 당연히 받을 생각은 없다. 받아도 아무것도 모르니 제대로 할 줄도 모르니까.


따르릉따르릉-

전화가 계속 울린다. 가만 보니 내 앞에 전화기만 울리는 게 아니고 팀 전체의 전화가 울린다. 전화망이 연결돼있는 것 같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보다 앞자리 앉아 계신 박 주사님과 눈이 마주친다. 왜인지 불안해 보인다. 저 눈빛을 잘 알고 있다. 자기가 받아야 할 것 같긴 한데 받지 말고 개겨보고 싶은 저 눈빛. 나도 전 직장에서 막내 시절 맨날 나만 전화를 당겨 받는 것 같아 바로 위 사수가 받을 때까지 개겨볼까 했던 그 눈빛. 그때는 그게 참 자존심 싸움처럼 느껴졌는데, 돌이켜보니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아무 의미 없는 자존심이 그때는 왜 그리 전부처럼 느껴졌는지.


결국 박주사님이 수화기를 당겨 받는다. 민원인인 눈치다. 잠시 후 신경질 어린 손길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박 주사님 옆에서 휴대폰을 보던 고 주사님의 자리의 전화가 울린다. 고 주사님이 그때서야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어 올린다. 업무 관련 전화인가 보다. 박 주사님의 눈치를 살핀다. 역시 예상한 대로 씩씩 화가 잔뜩 나 보인다.


직장생활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고 주사님이 받았으면 박 주사님이 저렇게 화나지 않았을 텐데. 아침부터 아까 식사할 때까지 고 주사님과 박 주사님이 서로 불편해하는 이유가 저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참 별거 아닌데, 아니 지나고 보면 그때 내가 한번 더 먼저 할 걸, 하고 말걸 했던 일이 그때는 마치 그게 전부인 양 자존심을 부리게 된다는 것. 앞으로의 나도 저런 모습이 나올까 싶다. 전 직장의 막내였던 나처럼.


'그나저나 점심시간에도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공무원분들은.'

그러고 보니 아직 점심시간이 안 끝났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전 직장에서는 지금 쯤이면 거래처랑 밥 먹고,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 시원하게 들이켜며 사내 직원 또는 거래처 누군가와 잠시 업무를 잊고 사적 대화를 떠들고 있을 시간인데, 바로 저렇게 업무를 보는 공무원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기업에서 일할 때는 그래도 점심시간에 밥 먹고 주변 산책도 하고 그러면서 리프레시하기도 했는데.


"저기... 박 주사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본다. 박 주사님 옆에 눈이 부서질 것 같은 형광색 작업 조끼를 입으신 아주 작은 키의 할아버지 한 분이 언제 오셨는지 서서 박 주사님을 조심스럽게 부르고 있다. 딱 봐도 70? 아니 80세는 돼 보이시는데, 자신보다 50년은 더 어려 보이는 박 주사님을 무척 어려워하는 눈치다.


"주 주사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도장받으셨죠? 갖고 오세요."

형광 할아버지와 잠시 말을 주고받던 박 주사님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를 부른다. 나는 내 책상 맨 위 서랍을 연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규공무원 오리엔테이션 때 받았던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 초록색 막대 도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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