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주사 이야기4
딸랑-
문 위에 달려있는 종이 명랑하게 울린다. 팀장님, 고 주사님, 박 주사님, 그리고 나까지 우리 넷은 <또와분식>이라 적힌 아주 낡은 간판집의 분식집 구석 한편에 자리 잡고 앉는다.
"다 김치볶음밥 드실 거죠?"
고 주사님의 물음에 이견이 없다는 듯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이모~ 여기 김치볶음밥 넷, 아, 주 주사님 혹시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여기는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어요. 오징어 볶음밥도 괜찮고요."
주방을 향해 소리치던 고 주사님이 깜빡 잊은 게 있다는 듯 나를 향해 묻는다.
"아, 저도 김치볶음밥 좋습니다."
사실 나는 김치볶음밥을 싫어한다. 평소 아삭거리는 김치의 식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불에 달궈져 흐믈흐믈해져 밥 사이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섞여 들어간 김치볶음밥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출근한 직장에서의 첫 점심이니 만큼 같은 걸 시킨다. 괜히 첫날부터 조직의 그들과 다르다는 걸 인식시켜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안다.
김치볶음밥 넷을 우렁차게 소리친 고 주사님이 자연스레 본인의 휴대폰을 꺼내든다. 뭘 보는지 열심히다. 그 옆에 앉은 박 주사님도 고 주사님과 비슷한 자세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아까 사무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뭔가 불만이 있는 표정이다. 내 옆에 자리한 팀장님은 감기에 걸리셨는지 연신 기침을 하신다.
기침하는 팀장님을 보고 있자니 물이라도 좀 떠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다들 휴대폰만 들여다볼 뿐 아무도 물을 떠 온다거나 식사를 위한 숟가락, 젓가락을 테이블에 세팅하지 않는다. 이전 회사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막내가 했던 것들이라 나도 깜빡하고 있었다. 좋소 기업에서 근무한 10년 중 8년 정도를 막내로 지내야 했다. 회사는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다며 신입 공개 채용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뭐, 말이 좋아 신입 공채지, 가'족'같은 회사 분위기를 강조하는 좋소기업 특성상, 공채는커녕 그냥 회장 아는 사람 꽂아 넣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막내 생활동안 물 떠 오기, 숟가락 젓가락 놓기, 커피 주문하기, 커피 받아다 자리 앞에 놓기 등등을 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게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그냥 사수가 내게 하라고 했던 걸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것이 8개월이든 8년이든, 그건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아니, 내게는 중요했을지라도, 막내인 나를 제외한 조직의 다른 모두는 중요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막내가 되었다는 생각에 울적해질 수도 있는데 나는 괜히 기분이 좋다. 회사에서 쫓겨나듯이 나와 약 1년의 시간 동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늘 집에서 공부하며 주방에 서서 점심을 대충 때웠다. 아내는 공부할 때 체력이 중요하다며 밥과 반찬을 꼭 챙겨줬지만, 왜인지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기가 죄스러웠고, 앉아서 먹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워 서서 5분 만에 후다닥 때우기 일쑤였다. 그때의 생각 때문인지, 이렇게 다시 어떤 조직에 직장 동료들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기침하는 팀장님을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 앞에 서서 은빛 스테인리스 컵을 꺼내 물을 받는다. 네 개의 물컵을 한 번에 들 수 없어서 일단 세 개만 떠서 손으로 겹쳐 테이블로 들고 간다. 팀장님과 두 주사님의 앞에 물컵을 놓는데, 내 눈에 발을 꼬고 흔들며 여전히 휴대본만 바라보는 두 주사님이 보인다. 마음속에서 요즘 MZ MZ 하는 나이 어린 직장인들은 정말 이렇게 싸가지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괜히 의식하면 꼰대 취급 당할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덩그러니 하나 남은 내 은빛 물컵을 갖고 자리로 돌아온다. 자리에 앉은 나는 테이블 오른쪽 구석에 놓여있는 숟가락 통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꺼내 테이블에 하나씩 세팅하기 시작한다. 허름한 분식집이어서 그런지 테이블이 깨끗한 거 같지 않아 티슈 한 장씩을 뽑아 아래 펼치고 그 위에 숟가락을 놓는다.
"콜록콜록. 어구, 고마워 주 주사!"
팀장님이 화들짝 놀라며 내게 고맙다고 한다. 그 눈빛이 왜인지 의아하다는 눈빛이다. 막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놀란 눈빛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아, 내가 나이가 많은 막내라서 그런 건가? 중고 막내니까. 뭐, 그게 대수인가 싶다. 그래도 전 직장에서 잘릴 때의 그 기분과 1년 동안 집에서 혼자 서서 밥 먹을 때에 비하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그거면 됐다.
먹을 세팅을 마치고 그 맛있다는 김치볶음밥이 나오길 기다린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우리 팀은 말이 정말 없는 것 같다. 처음 온 내게 아이스 브레이킹 겸 스몰 토크를 할 법도 한데 한마디도 없이 다들 본인들의 휴대폰만 본다. 여전히 테이블 아래서 꼬아 앉은 발을 휘휘 휘저으면서.
"아, 그런데 책임관님은 같이 식사 안 하시나 보죠?"
결국 무거운 분위기를 참지 못한 내가 어렵게 한마디 뱉어본다.
"책임관님은 아기가 아파서 오늘 오후 반가 내셨어요. 요즘 잦으시네요. 애 키우면서 직장 다니는 워킹맘의 비애죠 뭐. 전 그래서 애 안 낳을 거예요. 책임관님 보면 힘들고 귀찮기만 할거 같아서"
고 주사님이 답한다. 이제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 생긴 나는 아기를 갖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고 주사님은 딩크족인가 싶다. 하긴, 아직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행복은 본인이 결정하는 거니까 그런 고 주사님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시 테이블에 적막만이 감돈다. 이렇게까지 대화가 없는 점심식사라니. 무척 생소하다. 사기업 다닐 때는 이런 분위기가 되기 전에 막내급들이 작은 대화를 주도하곤 했는데, 요즘은 다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더 이야기를 이끌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역시 첫날부터 눈에 띄는 건 좋지 않다는 판단이다. 특히 저 고 주사님, 박 주사님처럼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 팀원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김치볶음밥 네 개 맞으시죠? 나왔습니다."
적막한 테이블의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마침내 분식집 사장님이 김치볶음밥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오므라이스처럼 얇은 계란말이로 둘러싸인 김치볶음밥이다. 큰 기대가 없지만 한입 떠본다. 음, 역시 별 맛은 없다. 김치볶음밥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 정말 이게 맛있나? 아니면 내가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못 먹어봐서 그런 걸까?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김치볶음밥이 나오기 전처럼 다들 본인들의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김치볶음밥을 들이마신다. 고 주사님의 식사 속도가 좀 늦는 것 같아 나는 일부러 밥 먹는 속도를 늦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 주사님은 순식간에 밥을 다 먹고 다시 휴대폰에 집중한다. 간간히 팀장님의 기침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팀장님의 물컵이 비지 않게 물을 작은 물통에 받아와 컵에 따라 드린다. 팀장님은 괜찮다며 본인이 하겠다며 내게 식사를 하라는 손짓을 보내신다.
비록 적막뿐인 점심식사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느껴본 회사라는 조직에 속한 기분이 날 여전히 기분 좋게 만든다.
"계산은 팀비로 낼게요. 주 주사님은 이따 따로 보내주시고. 아, 그냥 팀비 이제 주 주사님한테 넘길게요. 괜찮죠?"
고 주사님을 끝으로 테이블 위 김치볶음밥이 모두 사라지자 박 주사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계산대로 향하며 말한다. 들어보니, 아무래도 점심 식대를 팀원들이 팀비로 얼마씩 걷어서 한 번에 계산하는 모양이다. 그 관리를 내가 오기 전까지 막내였던 박 주 사님이 했던 모양이고. 이제 내가 막내니 내게 넘긴다고 하는 모양이다.
한 가지 놀라운 건 꼬깃꼬깃한 흰색 편지봉투에 담긴 현금으로 계산을 한다는 거다. 당연히 카드를 꺼낼 줄 알았는데 요즘도 현금을 들고 다니는구나 싶어 놀랐다. 계산을 마치고 아까의 그 "딸랑"소리와 함께 분식집 문밖으로 나선다.
"커피 한잔 할까?"
아까의 적막뿐인 테이블 위 식사가 걸리셨었는지 팀장님께서 애써 태연하고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고 주사님과 박 주사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여전히 본인들 휴대폰만 보며 걸음을 옮길 뿐이다. 사기업 다닐 때는 아무리 싫어도 팀장님이 물어보시면 대답이라도 하는게 당연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팀장님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괜히 거슬린다. 이전 좋소기업에서 내가 잘못 배운 건지, 아니면 요즘 트렌드는 이런 건지 잠시 의문이 든다. 막내인 나는 그런 무거운 분위기에 낑겨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본다. 팀장님이 애매한 몸짓으로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앞장선다. 역시 두 주사님은 말없이 그런 팀장님을 따라 걷는다.
"주사님, 이거 받으세요. 팀비고 이번 달 남은 돈은 삼만칠천이백팔십 원이에요. 맞는지 세보세요."
팀장님과 고 주사님 뒤로 걷던 박 주사님이 옆에 있던 내게 아까 분식집에서 꺼내 들었던 구겨진 흰색 편지봉투를 건넨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동전소리가 들린다. 마치 귀찮은 일을 떠넘기는 듯한 말투다. 어느 조직이든 막내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고 피곤하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게 되지만, 다른 이들은 그게 너무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아 하는 존재.
오히려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며 고통의 물음을 받아내야하는 존재.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새로운 조직의 막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전 회사에서 나올 때 워낙 힘들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1년여 동안의 공시 준비가 날 이렇게 만든 건지, 이전 직장에서와 달리 막내가 된 내 모습이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