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하얀 시간을 까맣게 죽이고. 또 죽이는 일

by 빨양c



고요한 아빠의 병실,

생명유지장치 소리만이 삑삑 대고 있다.

호랑이 의식 없는 아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티슈를 꺼내어 그날 소주잔에 긁힌 아빠 손가락 위 상처를 닦아준다.


“아빠.. 사실 그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나도 아빠 앞에 앉아서, 아빠 잔을 채워주고, 같이 짠도 하고 싶었어. 아빠의 이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도 닦아주고 싶었어. 낫게 해주고 싶었어. 왜인지 모를 침울한 보랏빛에 짓눌린 아빠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맞아. 할 수만 있다면 아빠를 꼭 끌어안고 괜찮다고 토닥여 주고 싶었어. 맞아…

이지랑처럼.

그러고 싶었어.. 근데...”


열심히 물티슈로 닦던 호랑의 손길이 멈칫한다. 아빠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호랑이 눈을 꿈뻑꿈뻑하고는 자신의 눈을 닦고 아빠의 잠든 눈동자를 잠시 바라본다. 똑같다. 눈꺼풀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다. 불편한 안도감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자신이 낸 목소리를 아빠가 들었을까 겁이 났다.


물티슈를 새로 꺼내 아빠의 헐벗은 발을 닦기 시작한다. 발톱은 제각각 자라 있고, 발바닥엔 굳은살 천지다. 요즘엔 굳은살을 벗겨내는 방법도 많던데, 아빠는 늘 이런 식이다. 아무리 알려줘도 하지 않는다. 자신은 아빠가 알려준 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아빠는 늘 바쁘다고만 했다.

맞아 아빠는 늘 바빴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못 돌보면서 왜 그렇게. 뭐 때문에, 바쁜 건지 호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랑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 아빠와 엄마는 가게를 차렸다.

일식집이었다.

“아빠 능력 좋은 거 알지? 자! 이제 이게 우리 가게야!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지랑이 호랑이 맛있는 거 잔뜩 사줄게!”

아빠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가게를 차리기 전 더 젊을 적 아빠는 본인말대로라면 자기 능력이 좋아서 회사를 열두 번이나 옮겼다고 했다. 아빠는 귀에 딱지가 들어앉도록 지랑과 호랑에게 말했다.

그렇게 능력이 좋아서, 자신의 그런 능력을 회사들이 품어주지 못해서 결국 아빠는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작은 해장국>과는 비교도 안될 커다란 식당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그 식당의 주인이었고, 식당 주인답지 않게 말끔한 정장을 입었다. 그때도 까만색 면 조끼를 하얀 와이셔츠에 걸쳐 입었었다. 어린 호랑이 봐도 일식집주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호랑은 그런 아빠의 모습이 좋았다.

자신에겐 없는 자신감 있는 모습.


호랑은 그런 아빠가 좋았지만 그 가게는 싫었다.

그전에 아빠가 회사에 다닐 때와는 달리, 아빠, 엄마, 지랑, 호랑이 둘러앉아 먹던 저녁식사시간이 사라졌다.


그 시간은 학원으로 채워졌고, 학원이 끝나고 갈 곳이 없어지면, 일식집 계산대와 주방 사이에 있는 작은 방이 호랑과 지랑이 머무는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곳은 일식집 특유의 알싸한 와사비와 쓴 미나리 향, 그리고 재료들이 풍기는 비릿한 내음만 호랑과 지랑의 곁에 머물렀다.

지랑은 그 공간이 자신들의 아지트라며, 뭐가 좋다고 왁자지껄 술 취해 떠들어대는 손님들을 관찰하고, 틈만 나면 그 손님들에게 다가가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학교 얘기를 떠들어댔다. 호랑은 그런 지랑이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웃으며 얘기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또 부러운 일이기도 했다.

호랑은 홀로 그 작은 방에 틀어박혀, 학교 교과서를 읽거나, 주변 마트에서 뿌린 전단지를 읽을 뿐이었다.


그렇게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하얀 불이 켜진 그 작은 방에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가끔은 잠이 들었고, 더 가끔은 주방에서 콩나물과 숙주를 손질하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집엔 언제 가냐며 물었다.

늘 같은 물음이었고, 늘 같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하얀 시간에 갇혀

까맣게 시간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게 호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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