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선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일이 없어졌다. 원래도 아이들과 있을 때는 정신없이 보내느라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이를테면 애들을 재우러 들어가서 누워있을 때, 청소기를 돌릴 때나 쌀을 씻을 때에도 항상 글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모두가 잠든 걸 확인하고 안방을 살며시 나왔다.
노트북을 켜고 잠깐만 쓰다가 다시 들어가야지 하던 게 몇 시간을 앉아있을지 모르니 아예 담요를 챙겨 오고 양말을 신었다.
신기하게 무엇에 대해서 써볼지 어떻게 생각을 풀어나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앉아도 일단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으면 뭐라도 쓰게 되는 거 같다.
뭐야 타고난 글쟁이 아냐? 하며 막 웃어대다가 그런 기분 좋은 착각으로라도 나를 응원한다.
그런데 2월 말부터 어린이집을 못 가다가 '악어 버스를 타고 매일 숲에 나가서 노는 유치원' 입학도 연기되어 아이들과 집에만 있으니 날로 글감이 줄어들고 있다.
오늘은 무턱대고 쓰고 싶지도 않았고 도무지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예전 글과 사진을 보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음을 확인했다.
헉... 오늘은 애들이 버티고 버티다 낮잠을 자지 않고 저녁에 일찍 잠들었는데....
그럼 내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날 흔들어 깨우거나 둘이 싸우고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로 눈을 뜨는 최악의 아침을 맞이 할 텐데... 상상만으로도 미간이 찌푸려지고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오늘은 이만하고 자야 한다.
내일 또 나는 전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기에!
코로나 전쟁과 육아 전쟁에서 난 전승할 거다.
코로나로 어린이집을 안 간다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집에 있는 첫날은 특별할 거 없이 동생이랑만 놀았는데 첫째는 어린이집 안 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루 종일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동생에게도 한없이 너그러운 오빠였다. 그야말로 컨디션 최상이었고 그날 밤에도 자고 일어나면 또 안 가는 거냐고 며칠 동안 안 가는 게 진짜 맞냐고 확인하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고 심심하다며 어린이집 가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던데 우리 첫째는 어린이집 가는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첫째가 어린이집 생활에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첫째가 어린이집을 가기 싫어한다는 소리에 선생님들이 놀랐을 정도로 모든 활동에 적극적이고 밥도 잘 먹고 무엇보다 친구와 부딪치는 상황은 피할 줄 알았다. 한참 떼쓸 때는 공격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거 같아 걱정했어도 누굴 때렸다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고 되려 몇 번 긁혀온 적은 있었다.
여전히 그 무엇보다 엄마와 있는 게 훨씬 좋고 몇 달 전부터는 낮잠 자는 게 싫어서였던 이유가 컸다.
다섯 살이 다가올수록 잠은 줄어드는데 억지로 낮잠을 자야 하니 힘들고, 그렇게 자면 밤에도 또 일찍 자기 힘들고 그래서 늘 자는 거라면 질색이었다. 그런 첫째이니 유치원은 낮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진작부터 거부감이 없다.
작년까지는 아침마다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어린이집 가는 준비를 하느라 씨름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싫다면서도 안 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못 이기는 척 따르는 게 대견하고 참 이뻤다. 그 무렵 어린이집 마지막 상담을 하게 됐다.
대부분 4살은 간단히 전화 상담도 많이 하던데 나는 평상시 선생님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얘기를 나누는 편이 아니었기에 궁금한 게 많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요즘 첫째의 어린이집 생활을 자세히 듣고 싶은 맘에 방문 상담을 했다.
길어도 보통 이삼십 분이면 끝나는 상담을 마지막 순서로 하다 보니 한 시간이나 하고 말았다.
그렇게 길어졌던 이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혼자 심각해져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질문하고 매달렸던 것 같다.
우리 첫째가 잘 못하는 거는 아예 하지 않으려고 물러나 있거나 안 하겠다고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잘하는 아이 것을 뺏으려고 해요.
보통 선생님이 같이 하자라던가 빌려 달라고 말을 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다는 거다. 그런데 첫째는 그렇게 말하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며 그냥 아예 참여를 안 하려 한다고.
내가 그렇다. 뭔가를 했을 때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으면 너무 실망스러워 좌절을 한다. 그래서 잘할 거 같지 않으면 시도자체를 안 하려 한다.
내 안 좋은 성향이 벌써부터 아이에게 나타난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진짜 나처럼 될까 봐 무서웠다.
이 시기에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첫째가 정말 나처럼 되느냐 아님 선생님 말씀대로 다 잘하고 싶은 욕구를 잘 살려서 진짜 잘하는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일까 봐 맘이 너무 무거웠다.
많이 접해봐야 잘하게 되진 않더라도 아예 안 하려 하진 않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칭찬도 해주고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첫째가 잘 안 하려 한다는 놀이를 같이 해봤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첫째가 자신감이 붙고 하고 싶은 맘이 들지 어려웠다. 중간에 안 하겠다는 소리만은 듣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가며 일단 즐거운 시간이 되는 것에 집중했다.
당연히 한 두 번 갖고는 달라지지 않았고. 자기가 못하는 걸 받아들이는데 힘들어하는 첫째를 보며 많이 속상했다. 자기가 해보지 않았거나 생각보다 잘 안되면 애초에 하려고 하질 않고 하더라도 가르쳐주려 하면 삐지거나 하고 있는 걸 흩트려버렸다.
그렇게 상담을 하고 온 후 한동안은 온통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다. 남편이 보기엔 내가 과민반응을 하고 유난스럽게 보일만도 했다. 유치원에 가기 전에 고치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걸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나아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 자꾸만 다급 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 노력보다 요 몇 달 아이가 정말 많이 자라서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와 같이 해보고 싶다고도 한다. 가르쳐줄 때도 자기가 가로채고 싶은 맘을 꾹 참고 기다리는 게 보여서 최대한 빨리 설명을 끝내려 한다.
대신 요즘은 뭘 하든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해서 너무 과해도 문제인 이 칭찬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질 좋은 칭찬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입시 미술을 하던 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던 줄리앙. 20년 넘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애들을 낳고 이 집으로 이사 와선 결국 창고 신세.
어렸을 적부터 나는 색을 좋아했다. 꽃잎, 색연필, 물감, 색도화지, 초, 실 등 특히나 그러데이션을 주어 색깔별로 나란히 있는 건 무엇이 됐든 환장했다. 이것만으로 미술이 적성에 맞다고 할 순 없지만 손으로 하는 건 웬만하면 다 잘했기에 미술학원을 다니고 예고도 가고 미술을 전공해서 직업을 갖고 싶었다. 하다못해 화방 주인이라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과에 진학하고 1년을 다니다가 갑자기 미대 편입에 도전했고 반학기만에 포기했다.
매일 왕복 네 시간씩 학교를 다니면서 알바도 하고 영어공부에 미술학원까지 정말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내 시간과 힘들게 버는 돈을 써서 합격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포기를 하면서도 그래도 시도는 해봤다는 거에 만족하며 미련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호주 호바트를 여행할 때 산책만으로도 행복했던 Battery Point의 이쁜 작업실. 드로잉 수업도 하는 것 같았다. 꿈에 그리던 공간.
그림 파는 상점은 무료 전시회나 다름없어 외국 있을 때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아일랜드에서도 밀린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하고 싶던 게 그림액자 사는 거였다.
오스트리아 빈 내가 좋아하는 훈데르트 바서의 건물안으로 직접 들어가보는건 정말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동남아의 이미지를 바꿔놓았던 태국의 디자인 센터. 디자인 미술관에 여권을 맡겨놓고 몇시간을 앉아있었는지 모른다.
레오폴트에서 바라본 이쁜 무목 현대미술관. 왼쪽/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오폴트 미술관. 이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에곤쉴레의 작품이 제일 많다.오른쪽
첫째 아이 상담을 한 이후로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미술을 좋아했던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 아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크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좋은 결과뿐만 아니라 나쁜 결과도 잘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되어 이것저것 다 시도해보고,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