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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에게 정말 묻고 싶어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젠가요?

by 타샤할머니




2015년 12월 19일

마치 말발굽 소리 같은 힘찬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애기는 1.4센티밖에 안되는데도 초음파에서 심장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아이가 건강하다는 이 모든 신호에 감사하다.


2016년 1월 24일
입체 초음파 하는 날.
엉덩이에서 머리까지 길이가 6.4센티로 엄청 작은데 팔다리가 다 생겼고 신기한 건 고 쪼그마한 놈이 통통 거리며 튀는데 (뛴다는 표현보다 튄다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리게 여러 번 통통 거렸다.) 눈물이 핑...
한 팔을 올렸다 내렸다 만세를 했다가 입을 벌렸다가 어찌나 활발히 움직이는지 정말 또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했다.
초음파 검사는 다 정상이고 이제 안정기로 접어들었다고...
이제 입덧만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6년 2월 13일

물구나무서있다고 귀엽다고 선생님이 ㅋㅋㅋ
15주 5일째인데.. 어? 여기 보이는 건 고추인가? 하신다.

어? 벌써 보여요? 맘의 준비가 안됐는데...;;
집에 와서도 다시 초음파를 보는데 애정이 새록새록 더 생기는 걸 느낀다.

빨리 만나고 싶다. 손짓 발짓 하나도 모든 게 다 귀여워!





임신하고도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보냈는데...

가장 행복한 순간에 대해 쓰기로 정하고 내게 문제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다른 엄마들은 언제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까 궁금해졌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에서 제일 크고 새로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이들과 우리 가족에 관련된 게 아니라는 사실에 미안함마저 들었다.

아. 태어나자마자 팅팅 뿔은 아기 얼굴을 보았을 땐 너무 못생겨서 소스라치게 놀라느라 행복할 겨를이 없었다 치자.

첫째를 낳고 하루하루를 정말 행복하게 보냈는데,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 같다는 말을 몸소 느꼈는데..

뭔가 힘든 일이 닥치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도 '아차! 나한텐 첫째가 이렇게 건강하고 이쁘게 와주었지, 내 아들이 되었지? 나한텐 첫째가 있지?! 근데 뭐가 문제야?!' 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훌훌 털어버리곤 했었는데..

그런 첫째가 태어나 처음 내 품에 안겼을 때? 그 이쁜 아이가 엄마라고 처음 불렀을 때 뭐 이런 순간이 아니다.

한적한 시골 주택에서 신혼을 보내며 소소한 일상에 행복과 편안함을 느꼈을 때가 아니다.

한결같은 남편을 만나 7년 만에 결혼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집에 들어갈 때 '이제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네' 라며 미소 짓는 남편을 바라봤을 때가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젠가요?'

2007년 까미노를 하기 전에는 난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누가 물어보거나 하다못해 비밀번호 찾을 때 정하는 질문 항목에서도 가차 없이 넘겨버리는 항상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스쳐 지나가듯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몇백 킬로를 땡볕에 걸으면서도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무작정 나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 돈을 모아 두 달 보름의 유럽여행을 떠나며 한 달 남짓은 산티아고로 향하는 까미노 트레킹을 계획했다.

처음 유럽여행을 갈 때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서유럽 위주의 관광을 하고 스페인 팜플로나로 갔다.

제대로 된 까미노 책자도 없었고 몇 가지 큰 정보만 가지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첫 모험이었다.

스페인에선 출발하기 전에 소포로 짐을 부치면 산티아고 우체국에서 보관을 해주었기에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2,3일 정도의 코스를 건너뛰고 팜플로나에서 까미노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걸으면서 풍경을 감상하고 사색에 잠기고 하는 여유를 즐길 수가 없었다. 보통 사설 알베르게나 B&B는 비쌌기에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에 묶기 위해 초반에는 마치 생존의 문제처럼 내 체력과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그땐 나에게도 언젠가 알베르게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문 옆으로 배낭을 쭈르륵 세우는 날이 오게 될지 몰랐다.)

팜플로나에서 까미노 여권(Credencial)을 발급받으며 챙긴 팸플릿에 8일째 되는 날 도착할 곳에는 공립 알베르게가 없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인포메이션 부스에 들러 위치를 확인하고 사설보단 낫겠지 하며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향했고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묵었던 까리온 알베르게 간판/ 레크레이션 시간에 1층 리셉션 앞에 모여 앉은 순례자들


숙소에 도착하니 그동안의 알베르게와는 다르게 수녀님이 레몬이 담긴 물 한잔부터 따라 주셨다.

침대를 배정받으며 간단한 안내사항을 들었고 저녁 여섯 시에 레크리에이션이 있으니 시간이 되면 와달라 하신다.

그때까지만 해도 귀담아듣지 않고 짐을 풀고, 씻고 쉬다가 저녁거리를 위해 나가서 여섯 시가 조금 넘어 돌아오게 됐다.

열린 문 안으로 1층 로비 소파와 바닥 그리고 2층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둘러앉아 수녀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난 차마 그 분위기를 깰 수 없어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열린 문 안쪽으로 살짝만 들어와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잠시 후 의자에 앉아 계신 수녀님께서 기타를 치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만약 천사의 목소리가 있다면 이런 소리였을까?

맑은 음색과 기타 반주만으로도 꽉 채워지는 이 노랫소리는 성스러웠다. (이 당시 나는 천주교인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컴포스텔라도 비종교인으로 발급받았는데, 정말 이 표현만이 정확하다 할 수밖에 없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슬프거나 힘들어서 우는 눈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수녀님의 노래는 멈추었지만 내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옆에 앉은 사람을 다독여주고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일행들은 서로 끌어안기도 하며 우리들은 그 순간, 그 감정을 교감하고 있었다.

내가 흘렸던 그 눈물은 따뜻함, 감사함에 흘렸던 기쁨의 눈물이었고 다 울고 났을 땐 마치 정화된 기분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게 뭔지 느껴봤다. 뭐든 잘할 수 있을 거 같았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다 좋고 모든 게 감사했다.

산티아고까지 걷는 길은 물론 한국에 가서도 정말 잘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다시 깨끗해져서 순수한 맘으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 기분이었다.


'천사의 목소리가 꼭 이랬을까?' 꼭 다시 만나고픈 까리온 알베르게의 마리아 수녀님


수녀님께서 여러분의 노래도 듣고 싶다고 성가가 아니어도 좋고 영어 노래가 아니어도 좋다고 말씀하시며 쭈욱 둘러보시더니 나를 지목하셨다.

많이 부끄러웠지만 한국인이 없었기에 그나마 나설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례객들 중엔 동양인이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쳐주고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며 호응해주는 눈빛에 힘을 얻어 꿋꿋이 과수원길을 불렀다. (그때 왜 하필 이 동요였는지 정말 모르겠다. 전혀 즐겨 불렀던 노래도 아니었다. 지금도 종종 아이들 자장가로도 불러주고 있는데 그 이유도 모르겠다.)

그렇게 얼떨결에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수녀님이 모든 순례자들을 위해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주셨다. 그리고 일일이 돌아다니시며 이마에 성호 그어주셨는데 그때 다시 한번 감정에 북받쳐서 더욱 많이 울게 되었다.



팜플로나에서 산티아고까지 약 700Km를 걷고 받은 순례 증서(Compostela)와 까리온에서 마리아 수녀님이 나눠주셨던 종이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해서였을까, 수녀님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까리온을 지나서부터는 순탄하게 걸었고 더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곳에서 함께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받았던 사람들과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며 걸었는데 그건 내게 무척이나 힘이 되었다. 혹은 내내 안보였다가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났을 땐 잃어버렸던 가족을 다시 만난 기분처럼 반가웠고 우린 뜨겁게 포옹했다.

까미노 블루는 산티아고 순례 후에도 그때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우울해하는 감정이나 항상 마음속에 까미노에 머물러 있는 현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난 여전히 까미노 블루를 앓고 있는 것 같다. (대신에 우울함보다는 그리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선물 받은 고마운 맘이 크다.)

나처럼 등산도 좋아하고 나와 참 잘 맞는 친구와 꼭 같이 걷고 싶었고, 어릴 적 내가 우상이었다는 친자매와 다를 바 없는 사촌동생과도 걷고 싶었고 이제는 우리 가족이 다 같이 걷는 꿈을 꾼다.

아직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가족에 관한 게 아니지만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다시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 아마도 그때 바뀌겠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한 번에 다 걷지 못한다면 내가 까미노 길 위에서 만났던 스페인, 프랑스 가족들처럼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걷고 그다음에 다시 이어서 걷고를 반복해서 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산티아고 성당을 꼭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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