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성당에서 세례식이 있던 날 꽃시장에 따라갔다가 김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만 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냥 당연히 이쁘니깐 이쁜 걸 보고 이쁘다 하는 건데....
고대 대학원을 다니는 차분한 룸메이트 언니에 비하면 공부도 못하고 맨날 헤죽거리는 말괄량이인 나는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때이다.
어떤 게 월등하고 어떤 게 가치가 떨어지는 거냐고. 높고 낮은 건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준이라고.
저마다 색깔이 다른 거뿐이라고.
이쁜 걸 보면 이쁘다 할 줄 알고 기쁨과 슬픔을 공감하는 네 능력이야말로 정말 멋진 거라고.
왜 그게 더 가치가 낮은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리고 나중에 김데레사 수녀님은 나에게 수녀가 돼라 하셨다.
대학교를 집에서 보통 두 시간씩 왕복 네 시간을 버스와 지하철로 다니다 4학년만 1년을 학교 근처 천주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여대생 기숙사에서 지냈다.
이 기숙사에 지냈던 시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터닝포인트까진 아니더라도 어찌 보면 가장 힘들었을 시기를 가장 맘 편히 지냈던 시간이었다.
공부하다가 잡생각이 나거나 지루해지면 한 번씩 창문을 열고 이쁜 정원에 있는 성모상을 내려다보고, 한 번씩 맘이 힘들 때는 새벽에도 경당에 내려가 그 고요함 속에서 묵상-말이 묵상이지 그냥 널브러져 쉬다 왔다-을 하고 오면 금세 마음이 안정되었다.
전국에서 온 대학생들과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나보다 훨씬 좋은 대학, 전공을 하고 이쁘고 부유하고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을 많이 봤다.
예전 같으면 한없이 부럽기만 했을 텐데 안타깝고 안쓰러운 맘도 들었다.
애들은 눈에 보이는 좋은 조건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즐길 줄을 몰랐다. 만족하지 못하고 늘 조급해하며 못 가진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꼭 욕심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들이었으면 하루하루가 신났을 텐데 대부분 얼굴 표정도 어둡고 마주칠 때마다 힘들어 모이는 모습이었다.
김데레사 수녀님께서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질문이 많았던 난 기숙사 사감이셨던 김데레사 수녀님께 견진 교리를들으면서 많은 영향을받았던 것 같다.
겉으론 항상 웃지만 속으론 베베 꼬였던 내 생각이 그때 많이 성장한 것 같기도.
원장 수녀님은 마드리드에서 오신 엘레나 수녀님이라는 분이었다.
수녀님과 기숙사 환영회 때 처음 만나 까미노를 했던 경험으로 스페인어를 흉내 내다 친해졌다.
까미노를 할 때 마주치던 스페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부엔 까미노' 아님 '부에노스 디아스'였다. 아는 스페인어를 총동원했을 때 엘레나 수녀님은 "저녁에는 노체스에요 부에노스 노체스"라고 알려주셨던 게 처음 우리가 나눴던 대화였다.
엘레나 수녀님은 아이러니하게도 까미노를 한 번도 해보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 여름 방학 때 오랜만에 고향으로 휴가를 가시는데 그때 가족들과의 까미노를 계획하고 계셨다. 경험자인 나에게 궁금한 것들을 묻기도 하셨는데 그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1학기 종강하기 전에 파스, 밴드, 부채 등등 까미노를 하며 도움이 될 것들을 조금씩 담아 선물을 드렸던 게 기억이 난다. 돌아와서 사진들을 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실 때 들으니 기쁘게도 꽤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견진성사 때는 사감 수녀님과 함께 오셔서 축하를 해주시기도 했고 기숙사 근처 북한산과 북악산을 오르며 함께 계절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산에 오를 때 수녀님께서 직접 만들어오셨던 주먹밥과 스페인 소시지 쪼리조를 바위에 앉아서 먹었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23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실 때는 배웅 나가서 엉엉 울었고 한편으론 정말 오랜만에 고국으로 가시는 거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스페인 수녀회가 이만큼이나 자리를 잡고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셨기에 발령 훨씬 전부터 스페인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던 나였다.
몇 년 후 아일랜드에 있을 때 수녀님을 만나러 마드리드에 갔었고 수녀님이 계시는 학교에서 여러 수녀님들과 머무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냥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난 수녀가 될 자격? 자신? 이 없다고 생각하고 김데레사 수녀님의 권유를 한 번도 받아들일 생각조차 못했었던 나지만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그곳은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고 정착하고 싶은 맘이 들게 했다.
2011.2.10. 공항에 갈때는 언제나 신나건만.. 23년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시는 엘레나수녀님을 배웅하는 날은 내 인생 가장 슬픈 공항 가는길이었다.
며칠 묵었던 수녀님이 일하시는 학교이자 수녀회.왼쪽/수녀님과의 시티 데이트! 마요르 광장도 같이 가고.가운데/알무데나 성당 안 소성당의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도 찍을수있었다.오른쪽
수녀님과 함께 국립 프라도 미술관도 가고 레티로 공원도 갔었던 날은 하루종일 싱글벙글이었다.
수녀님과 엘 에스꼬리알 데이트. 산로렌조 수도원을 관광하고 그곳에 있는 수녀님 수녀회에 가서 맛난 점심을 얻어먹었다.
뭐니 뭐니 해도 마드리드 수녀회 근처 수녀님이 자주 산책한다는 공원을 수녀님과 함께 거닐었을 때가 제일 그립다...
엘레나 수녀님이 나에게 왜 그토록 큰 존재가 되었을까?
아무리 한국에 오래 사셨어도 의사소통이 엄청 원활했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수녀님은 원래도 진중하시고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니셨다. 그냥 함께 있고 싶은 이유가 컸다. 단지 같이 있는 게 좋았고 우린 그리 많은 대화가 필요치 않았다.
엘레나 수녀님과 함께 있으면 괜히 든든했고 그래서 힘이 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전해지는 따뜻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생각이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하고 와 같은 이유가 아니어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워지고 이렇게도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구나 처음 느꼈다.
나에게 인자한 엄마 같은 엘레나 수녀님께 3주째 답장이 안 오고 있다.
유치원 입학을 축하해주시며 기도해주신다고 아이들과의 최근 사진을 좀 보내달라시던 메일이 마지막이었고 내가 사진과 안부를 물었던 메일은 수신확인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에 코로나 19 확진자가 가장 많고 사망자도 급격히 늘어나 곧 의료체계에 마비가 올 것이라는 뉴스를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을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