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있을 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갔던 딸기 농장에서 4개월 정도 일을 했다.
대부분 여자들은 딸기를 포장하는 일을 했는데 나는 계속 같은 공간에 갇혀서 똑같은 일만 반복하기 싫었다.
힘은 좀 더 들더라도 오늘은 이 밭 내일은 저 밭, 그날그날 다른 풍경을 보며 매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지루하지 않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앉아서 발로 움직이는 수레를 끌고 딸기를 땄다.
생각보다 딸기 따는 일은 재밌었고 돈도 잘 벌었고 무엇보다 모든 환경이 좋았다.
정말 바쁠 때만 늦은 오후까지 일을 했지 그 외에는 패킹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먼저 일을 마치고 일찍 돌아왔다. 그리고 여유 있는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호주 시골을 만끽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은 물론 일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음악을 들으며 리듬감 있게 톡톡 딸기를 따고 밭을 옮길 때마다 자연 속에 파묻혀 있음을 감사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살을 찌워 봤을 정도로 -나도 살이 붙는 사람이었다. 물론 출산 후에 알게 될 사실이었지만- 최고로 맘 편안히 힐링하며 지낸 시간이었다.
아~ 일을 마치고 차 타고 오면서 창문을 열고 맞았던 나무 냄새나는 그 시원한 바람이란....
나에게 정비된 시골은 어디든 최고로 매력적이다.
그 당시 살던 동네도 깨끗하고 조용해서 시간 날 때마다 마실 차를 한잔 타들고 잔디밭에 나와 앉아 있었고 날마다 산책할 수 있는 이쁜 숲길이 근처에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그렇게 좋을 땐 모두 자연과 연관이 되어있다.
호주의 흔한 풍경. 왈라비가 딸기를 베어먹는 마치 합성같은 상황을 맞딱드리기도!
남편과 결혼을 생각하며 둘 다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도 우리가 살 집에 대해 크게 걱정해본 적이 없다.
남편의 회사가 경기도 외곽에 있고 몇 번 와봤던 난 시골이라 더 맘에 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결혼을 하면 남편의 회사 근처에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린 남편의 회사까지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작은 텃밭이 딸린 작은 2층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가끔씩 주말에 둘이 같이 버스를 타고 나가 데이트를 하고 또 같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정말 좋았다. 여전히 연애하는 기분,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올 때면 남편이 집 앞 정류장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도 너무 좋았다. 이렇게 내가 볼일이 있을 때만 도시에 가면 되지 그 외엔 이렇게 한적하고 평화롭게 사는 시골 생활이 참으로 행복하다.
쌈 모종을 심을 때쯤 먼저 씨를 뿌렸던 루꼴라 새싹들이 올라왔고 제일 마지막으로 고추 모종을 심었다
맨 왼쪽이 루꼴라 그 다음이 쌈채소 그리고 마지막은 고추. 쓰러지기 전에 쫄대를 연결해야 했다
집 현관 옆에 심었던 팬지꽃이 사랑스럽고 텃밭 옆에 커다란 목수국은 정말 소담스럽게 이뻤다
결혼 전 두 시간씩 왕복 네 시간을 서울로 대학교와 직장을 다녔던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길거리에 버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삶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을 이동하는데 버리는 게 너무 아깝고 인생 통틀어 따져보면 어마어마한 양일 텐데 그게 어떤 가치보다 중요할까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편안히 쉬고, 남들보다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게 돈과 그 어떤 생활의 편의성보다 큰 가치였다.
거기다가 나에겐 좋은 영향을 주었던 시골에 살던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많다. 그래서 내 아이들도 꼭 시골에서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결혼 6년 차에 들어선 지금까지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산책하다가 꺾어온 도라지 꽃. 산책할 때마다 시골은 내게 선물을 준다
첫째가 태어나고 추운 주택은 거기다 집안에 계단까지 있는 2층 집은 아기를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몸도 안 풀렸을 때 첫째를 안고 집을 보러 다니다가 당초 계획보다 2년 앞당겨 옆 마을에 있는 아파트로 내 집 장만을 해서 이사를 왔다.
이 아파트는 산책로가 잘 되어있어서 이사 오기 전에도 첫째 출산 예정일 즈음 몇 번 걸었던 곳이다.
봄에는 산수유를 시작으로 목련 벚꽃 그리고 조팝나무까지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 여름에도 나무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알록달록 장미꽃과 철쭉이 지고 가을이 되면 첫째가 좋아하는 놀잇감인 나뭇잎 천지가 된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보다 시골에 사는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현저히 덜 받고 창의성이 발달된다고 한다.
비록 아파트지만 창으로는 도로와 빌딩 숲, 자동차들이 아니라 산줄기와 나무가 보이고 사계절을 고스란히 느끼며 살고 있다.
집에서 장난감으로 놀 때는 금방 싫증을 내지만 바깥에서 놀 때는 나뭇가지나 흙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아이들이 흙에서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이 환경에 만족하지만 나는 더 더 더 완벽한 시골을 꿈꾼다.
내 아이들이 맨발에 팬티바람으로 흙 퍼먹고 노는 그림까진 아니지만 -난 정말 이걸 바랐었다- 조금이라도 덜 획일화된 공간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사는 더 완벽한 시골살이를 꿈꾼다.
우리집 밖으로 나가면 지루할 새가 없다. 언제든 놀것들이 널려있고 더불어 눈과 맘이 호강을 한다.
옆 마을 신혼 때 살던 주택 집 앞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이 야외 수업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꽃을 심고 하는 모습들을 자주 보았다.
혁신학교였다는 걸 알게 되고 우리 아이들도 이 학교를 다니면 참 좋겠다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중학교 때 공부 따라가기 힘들다는 이유로 혁신 학교를 꺼리고 있다는데 난 아직 흉내를 내는 단계라 하더라도 옛날처럼 똑같이 주입식 교육만 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평가와 통제를 위해 개개인의 색깔을 흐리고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꺾으려 한다면 난 학교를 안 보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옆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얼마 전 첫째 어린이집 원장과 잠깐 대화를 나누다 중학생인 아들을 위해서 도시로 나가 살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그때가 되면 지금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질까 잠깐 생각에 빠졌다.
안 그래도 요즘 첫째가 입학할 유치원이 다른 사립 유치원들보다 일찍 끝나서 뭘 하나 배우거나 경험해봤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나다.
그냥 다른 애들이 다 다니니깐 우르르 가는 곳으로 태권도를 보내고 피아노를 보내고 하기는 싫었고 그럼 뭘 하면 좋을까 하다 보니 뭘 하든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실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그러고 나서 이내 아이가 고달픈 사교육에는 절대 시간과 돈을 쓰지 않겠다고, 그냥 어릴 땐 맘껏 놀리겠다더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전엔 피아노 잘 치는 회사원, 태권도 잘하는 회사원 되는 거라며 비아냥 거리던 남편도 막상 아이가 커가니 '첫째야 이거 하고 싶어? 너 이거 할 거야?' 하면서 한 번씩 묻는 게 이렇게 결국 변하기 시작하는 건가 무서웠다.
하지만 첫째가 유도학원에 다니지 못해도, 아직도 한 번씩 '아 지금 그거 먹고 싶다'하며 우리 동네엔 없는 프랜차이즈 음식이 갑자기 먹고 싶어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골살이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오히려 주변 엄마들에 휘둘리거나 복잡해지는 상황에 흔들릴 일이 없게 더 시골로 들어가 살고 싶다.
우리 아파트 옆에 물이 더러워 들어가지도 못하는 큰 하천 대신 내가 어릴 적 송사리를 잡던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시골.
우리 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밭 대신 가을에는 쌓아놓은 볏짚에서 놀고 겨울에는 썰매를 탔던 이쁘게 논이 펼쳐진 시골.
봄에는 엄마랑 나물을 캐고 가을엔 갈대밭을 거닐던 이야깃거리가 많은 내 어린 시절을 내 아이들도 갖게 해주고 싶다.
불편함 보다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얻는 행복이 그에 비할바가 아니기에, 느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이 귀중한 가치를 내 아이들도 느끼면서 풍요로운 마음으로 자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