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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쁨문고 Oct 08. 2024

시작하기 싫은 날의 마무리

하기 싫어병에 걸린 최근 근황 전달해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주니님. 저는 매번 좋은 에너지를 많이 보내주시는 주니님을 볼 때마다 놀라는 주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솔직히 요즘 여러모로 나른한 삶을 살고 있어서인지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회사에서의 생활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고, 문득 이렇게 지내도 되는지 모를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에 걸려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옆에서 동기부여가 되어 주는 주니님께 감사하단 생각이 문득 드네요.


 다시 생각해 보면'싫어병'에 걸린 주된 이유는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을 위해 벌여놓은 게 많은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최근 남미를 다녀온 이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찾아서 해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마음에서 불타오르는 원함이나 끌림이 있는 게 아니었지만 일단 시도하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숙제처럼 쌓여버린 일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아시죠? 시험 기간에는 뭐든 재밌게 느껴지는 것 말입니다.

남미여행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숙제하려다 보니 청소가 재밌고, 벽지를 쳐다보는 것이 즐거운 상황 말이에요. 가지고 있던 재미라는 영역의 범주가 흐트러지는 날들입니다. 여하튼 4월과 5월은 저에게 숙제를 해나가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숙제처럼 쌓여버린 일들을 하려다 보니 딴짓을 많이 하게 된다는 점이에요. 딴짓한다는 건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쓰일 시간마저 보내버리게 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최근 관심이 있는 단어를 고르라면 '선택'입니다. 같은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의 중요성에 대해서 저보다도 더 잘 아실 분이니 강조하진 않겠습니다. 어느 순간 선택은 거창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중요도를 따지기 힘든 상황일 때나, 급박한 상황이라거나, 기회비용이 너무 클 때, 혹은 선택 전 압박이 강할 때까지도 말이에요. 어느 순간부터는 용기를 냈습니다. 물론, 일상에서 있는 소소한 선택의 갈림길에서지만요. 불과 4~5년 전이라면 쉬이 선택하지 못할 일을 고르는 거죠. 예를 들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기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선택이라는 변명을 시작해봅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한 21세기 청년의 자세라고 스스로 압박해 왔기 때문에 제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것 중 하나기도 했거든요. 아시죠?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말이에요. 우리는 이걸 휴식으로 부르기로 했다죠? 하지만 이런 생활이 익숙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를 남용하기도 하면서 '계획된 휴식'인 척하는 것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문제기도 하지만요.




 그러고 보니 작년까지만 해도 누워있거나 TV로 프로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맥주와 함께 간단하게 요리해 먹는 재미를 즐기기도 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야구를 한번 틀어놓기 시작하면 앉은자리에서 3시간 정도는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되어 버립니다. 물론 2024년 자이언츠의 경기력이라면 시간을 절약해 줄 수 있겠지만요. 유난히 올해는 야구에도 관심이 덜해지는 라이트한 팬입니다. 시즌의 시작을 함께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매번 승리 요정을 자부했던 제게 직관 3연패가 크게 느껴져서일까요.

이긴 날은 그렇게 좋은데


 어느 한 해 주니님의 직관 승률이 떠오르네요. 그땐 참 운이 없는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누구보다 꾸준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승패도 매우 중요하지만, 야구장에서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재미잖아요. 주니님은 그런 경지에 오르신 걸까요? 사실 저는 지는 경기에서도 호수비가 나오거나 단 1회라도 공격이 살아나면서 응원에 온몸을 불사를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직관'이었다며 호평하는 편입니다. 결과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텐션은 다르겠지만요.


 그런데 올해 자이언츠는 뭔가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무기력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작년 이맘때는 과하게 야구를 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매일 최소 두 시간 반이상을 야구에 매여있어야 하다 보니, 가끔은 경기가 끝나고 난 뒤 소비한 시간이 아까울 때가 생길 정도였죠. 다양한 방법을 활용했는데, 그중 운동을 병행하는 게 꽤나 알찬 시간이더라고요. 1시간 조금 넘게 무게를 이겨내는 동안 야구를 함께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가성비가 있습니까.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지루하지도 않았고, 주로 이기던 나날이었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운동도 꾸준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야구 보느라 운동을 빼먹은 적도 있지만,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요.


한참 길게 이야기하는 중이지만, 하기 싫어병을 야구 탓으로 돌리는 중입니다. 잘 쓴 보고서는 두괄식을 사용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글이 두괄식이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 나름의 우선순위가 있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회피라는 선택을 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리에 앉아야 하고,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하며, 독서를 위해서는 책을 펴야 하는 진리를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막상 돌입하게 되면 몰입하는 것까지는 금방인데. 그렇죠?


 몰입하지 못할 땐 결국 또 딴짓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겁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 것은 참 좋습니다. 문자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 것도 좋지만, 짧은 글로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저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음성으로 오가는 스킨십이 참 좋더라고요. 목소리의 톤, 빠르기, 숨소리 등을 통해 상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점이 특히나 좋습니다. 오랜만의 통화는 이런 장점도 있습니다. 만나기 힘든 상대와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묻다 보니, 일기장을 펴는 느낌을 받기도 해요. 사람마다 다양한 드리킴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활기에 찼던 때의 모습, 한없이 좌절하던 때, 또 그것을 딛고 일어서기도 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까지 각각 다른 제 일부를 기억해 주고 있거든요.




 지인 중 어떤 분은 그렇게 표현하시더라고요. 드리님은 사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 것 같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 말씀만큼 기민하지도, 영민하지도 철저하지 않은 편입니다. 마침, 문득 생각나서 연락하는 편이거든요. 생각난 김에 전화 버튼을 누르는 것 외 다른 걸 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목소리를 듣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왠지 모를 유대감이 생기긴 합니다. 그런 유대감이 몇 번 이어지기 시작하면, 그 감정은 흩날리지 않고 스며들 듯 제 안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보는 능력은 제가 가진 소중한 능력이라 생각이 들어요.(너무 오랜만에 연락하니까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요….) 아마 이번 주는 주니님에게도 전화를 해볼 것 같습니다. 너무 늦어지지 않게요.


 윗 문단의 글을 마치자마자 주니님께 전화를 걸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집중이 끊겨버려 다시 글을 시작하는 게 어려웠지만, 목소리를 듣고 나니 다시 기운이 생깁니다. 잘한 선택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주니님의 정성 가득한 긴 편지에도 담기지 못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으니까요. 객관적으로 글을 보는 것에는 방해가 될 수 있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편지에서 음성이 지원되는 듯한 느낌도 받습니다. 마침 주고받는 글의 양식이 편지이다 보니 목소리가 들리는 글도 꽤 즐거운 일이라 생각되네요.

그날의 밖은 날이 참 좋았습니다





 올해 선택(혹은 간택당했을지도) 중 잘한 일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그중 하나는 우리의 관계인 듯합니다. 몇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렇게 꾸준한 편이 아닙니다. 꾸준하게 노력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요. 꾸준히 하는 재능이 없다고 표현하기엔 스스로에게 미안하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하고 싶던 걸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다시 감사함을 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하기 싫어병'에 걸렸는데도 말이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을 때 지키려 한 부분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꾸준히 쓰기. 두 번째는 잘 쓰려고 하지 말기. 너무 잘하려고 하면 지쳐버린다는 말이 맴도는 요즘입니다. 야구 탓을 하고 있지만, 마냥 모든 것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무기력해질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만에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글을 쓰다가 다 지워버리고 다시 일상의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도 같은 결입니다.


 확실히 큰 욕심을 덜어내니 조금 더 즐거움이 커지거든요. 그런데, 야구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일까요? 욕심을 덜어내야 더 즐길 수 있는 걸까요? 그래도 비용을 지불하고 보는 스포츠인데, 패배를 너그럽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요. 마음을 비우고 싶어도 쉽지 않네요.


 히어로 캐릭터가 나오는 마블 시리즈 중 캡틴 아메리카를 아시나요? 매력적인 캐릭터가 참 많았는데, 딱히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 같은 캡틴 아메리카에 대해 물음표를 가지던 친구들이 더 많았습니다.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캡틴의 능력은 도대체 뭐야?”. “아, 아마도 리더십 아닐까. 흐흐” 정말 특별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캡틴아메리카는 좋아하는 야구팀의 일정을 꿰고 있을 만큼 야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세상 가장 개성이 강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조직을 이끌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야구를 좋아한다는 설정과 맞아떨어지는 게 아닐까요. 다시 보니 엄청난 능력이네요. 저도 그런 생불이 되긴 힘들 것 같지만, 우선 약속했던 주니님과의 직관해 보기를 위해 좀 더 참아보고 집에 있는 유니폼들을 정리해 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하기 싫어병으로 인한 청소병이 도졌거든요)

페스티벌도 재밌는 5월인데..


- 5월에는 함께 직관하는 일정을 조율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라이트 한 팬 드리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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