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인연으로 나를 좋은 곳으로 안내해 준다.
첫날, 안내해 준 분은 차량을 몰고 뉴델리 시내를 지나 점점 깔끔한 동네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엔 그 동네가 그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이태원이나 강남 같은 좋은 동네에 사는 것처럼, 나도 그런 지역의 셰어 하우스를 렌트하게 된 것이다.
소개받은 단독주택은 대략 30평대의 인도 기준으로 꽤 괜찮은 집이었다. 테라스와 침대, 집안 환경이나 동네 분위기 모두 잘 꾸며져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이미 4명의 한국인과 외국인 1명이 있었다. 반갑게 맞이해 줄 것 같았지만, 모두 어색한 인사만 주고받고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내가 낯선 상황에서 어색함을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첫날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어색하기 마련이다.
내가 들어가기로 한 방에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이미 있었다. 조금 놀랐다. 셰어 하우스라니, 침대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방에서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누고 나의 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저씨의 직업은 의사였다. 함께 쓰는 셰어하우스지만 방안과 바깥공기 모두 차갑고 어색했다.
다음 날, 함께 사는 사람들 중 나보다 나이가 어린 한 친구가 유심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오전에는 어학원에 갔다.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과 인사하며 1년 동안 공부한 영어 실력을 테스트해 보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었고, 몇몇은 남미와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학원의 체계적인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내가 지금껏 배운 영어는 며칠 만에 탈탈 털린다. 듣기부터 말하기 다양한 표현등 점점 아기처럼 얼버부리게 되고, 자신감은 점점 사라지게 됐다.
수업 중 가장 어려웠던 건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주변 사람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 또는 회사에서 보내준 어학코스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왜 여기에 왔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웠다. 서른두 살, 결혼도 하고 철들어야 할 나이에 영어를 배우러 온 내가 스스로에게도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니 아저씨는 옷을 갈아입고 어디론가 가셨다. 방에 혼자 남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아저씨가 돌아오셔서 "같이 나가자"라고 하셨다. 이미 몇 마디 주고받은 사이여서 어색함은 덜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서로 영어이름으로 불렀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뉴델리 역사적인 현장을 탐험하러 갔다. 설명은 해주시지만 기억이 남지 않는다. 사진도 찍고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날이 어두 컴컴할 때까지 돌아다니다 나를 위해 한 곳을 소개해주셨다. 술을 파는 가게다. 우리나라는 편의점이나 기타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이곳 인도는 술을 살 수가 없다. 지정된 몇 가게만 파는데 많지도 않아서 찾기가 수고스럽다. 당연히 길거리에서 술을 먹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맥주를 사둘고 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이튿날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보내며 시간이 지나갔다.
열흘쯤 비슷한 생활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한 변화가 나에게 찾아왔다. 숙소가 나와 맞지 않다고 느꼈을 때, 학원 측에서 새로운 셰어 하우스로 안내해 주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이전보다 아담했고, 분위기는 훨씬 따뜻했다. 새로운 집에는 또 다른 터줏대감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번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분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셰어 하우스에서 남녀 단 둘이 함께 생활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며 방에 대한 규칙을 설명해 주셨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누나는 여행가이자 작가였다.
누나는 첫날 비행기 내 옆자리에 앉았던 소녀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강한 자신감과 주체적인 모습이 보였다.
최근에 읽은 '데미안'
나는 그곳에서 데미안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싱클레오가 된 기분이었다.
이 집은 따뜻한 에너지가 넘쳤다. 데미안 같은 그녀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하우스를 방문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6개월 동안 함께할 인연을 만들었다. 그녀는 인도 여행과 인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를 통해 여행과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한참 좋은 며칠을 보내고 그녀는 혼자 떠날 여행을 계획을 잡고 있었다. 나는 6개월 어학 코스가 있어서 수업기간 내에 여행은 생각도 못했다. 아니 그건 어린 방황 같은 거라 생각했다.
떠나기 며칠 전 그녀가 말을 꺼냈다.
"준!! 같이 여행 갈래." 그 당시 나의 영어이름은 준이었다.
가고 싶어요. 누나 하며~~ 나는 상상했다. -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녀가 떠나기 하루 전 나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 이후로 전화로 몇 번의 연락만 이어가다 내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늦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만약 그때 여행을 갔다면 나는 인도생활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그건 나의 여행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좋은 각자 만의 여행, 혼자 느끼고 생각하고 그런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배운 인생과 여행을 나는 배웠다.
그녀는 떠났지만 남은 빈자리 셰어 하우스는 함께할 다른 좋은 친구들로 가득 채워져 행복 하우스는 계속 이어졌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처음엔 최악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의 인연이 나를 좋은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하지만 좋은 곳도 언제든 나쁜 곳으로 변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목적이 있어야만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여행은 작은 나의 인생이었다.
그렇게 나는 두 달 동안 인도 생활을 이렇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