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이 가져온 변화
한 달 만에 델리 집으로 돌아와 나를 반겨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집이다.
학원에도 다시 갔다. 한동한 말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3개월 정도 지나 영어가 갑자기 성장한 느낌이었다. 여행을 통해 얻은 자신감 덕분인지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며 내 안에 변화를 조금씩 느꼈다.
얼마 후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다.
키가 작고 체격이 왜소한 낯선 외국인이 나를 응시했다. 그는 이 건물 꼭대기 층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몇 마디 간단히 주고받은 후, 집으로 들어갔다. 어딘가 친해지고 싶지 않은 느낌이 들었고, 낯익지 않은 인도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 후 몇 번 더 마주치고 대화는 점점 길어졌다. 갑자기 그의 유창한 영어와 또렷한 목소리가 매력으로 다가와 그의 집까지 방문하게 되며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다.
그는 인도에서 IT를 공부하는 개발자다. 같은 분야로써 서로 공감대가 있었다. 조금씩 의심은 풀리고 나는 점점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화술이 좋았다. 언제나 먼저 말을 걸며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
친구가 되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며, 그의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된다.
그는 나의 영어 선생이 된다. 내가 학원에서 배운 것과 대화 속에서 많은 부분 보완해 줬다. 앞으로 나의 동반자가 되며 많은 부분 영향을 준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친구는 네팔 사람이다.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선뜻 승낙하기가 어려웠다.
수업도 재미있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 그대로 델리에 머물며 귀국을 생각했다.
나에게 생각지 못한 변화다. 그와 함께한 시간과 신뢰는 네팔이라는 나라에 호기심이 생겼다.
결국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향하게 된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동안 여행을 통해 배운 것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우리는 로컬 사람들 사이에서 집으로 가는 교통수단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집까지의 거리는 가늠할 수 없었고, 예상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낡은 봉고차를 구해 여러 명과 함께 차에 올랐다. 봉고차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구형이었다. 집으로 가는 여정은 무려 8시간이 걸리는 고행 길이었다.
굽이굽이 산을 따라 아슬아슬한 도로는 아찔했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길을 지나며, 차는 심하게 흔들렸고 비포장도로는 멀미할 만큼 거칠었다. 가끔 산사태로 도로가 막혀 차를 멈추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도로에 나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런 험한 길을 수차례 넘으며 마침내 도착한 곳, 그곳이 그의 집이었다.
아담한 주택에 도착하자, 그의 어머니와 두 남동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의 느낌이 났고, 좁은 집 안은 80년대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입맛이 도통 맞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네 집이라 맛있게 먹어야 했다. 어머니는 우리 엄마처럼 포근한 인상이었다. 남동생들은 매우 친절하고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친구들을 소개받으며 술도 먹고 색다른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네팔은 밤이 되면 전기공급이 불안정하여 한번은 펍에서 촛불을 켜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분위기가 색달라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친구 동생들에게는 한국식 라면을 자주 끓여 줬다. 나와 같이 어머님 요리에 불만이 많았다. 며칠 동안 즐겁게 동네를 기웃거리며 우리는 네팔여행을 계획했다. 드디어 친구의 제안으로 가까운 친척집 포카라로 향하게 된다.
네팔은 인도와 가까운 나라지만, 사람들은 인도인보다 훨씬 순수한 인상을 주었다.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지만, 그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었다. 네팔은 인도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등 여러 면에서 의존적이다. 네팔 사람들은 인도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삶의 방식을 경험하면서, 나는 네팔이 점점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