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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01. 2024

3162일

    3162일. 2015년 11월 23일 개통하여 2024년 7월 20일 유심을 뺄 때까지 갤럭시S 6를 사용한 일수이다. 약 8년 8개월 동안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던 휴대전화인데 계획했던 10년을 못 채우고 공기계가 되어버렸다.

사실 나보다 주변에서 더 성화였다. 휴대전화 좀 바꾸라고. 하지만 기본 기능만 쓰는 나로서는 굳이 최신 휴대전화를 사고 싶지 않았다. 소신대로 어떻게든 버티려 했는데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로 기능에 이상이 생겨 계획보다 일찍 항복해버렸다.


    일단, 뒤판에 심각한 금이 가 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실수로 떨어뜨렸을 때 생긴 금이다. 당시 뒤판은 물론 앞판도 심각하게 금이 가서 서비스센터에 갔더니 기사님이 수리보다는 교체를 권했다.

    “이미 부품 생산이 중단된 제품이라…. 앞판은 그나마 다른 색상으로 재고가 남아 있긴 한데 뒤판은 수리가 어렵습니다. 비용 면에서도 새 제품을 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때는 제품이 출시되고 겨우 3~4년 되었을 시기였다. 그런데 벌써 부품 생산을 중단하다니. 기계값만 80만 원 남짓인데. 휴대전화가 소모품이 아니라 사치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냥 색상이 안 맞아도 좋으니 앞판만이라도 바꿔 달라고 했다. 그 결과 뒤판과 홈버튼은 블루 토파즈, 앞판은 골드 플래티넘 색상으로 미관상 매우 부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쓰던 걸 계속 쓸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하면 다들 희한하다는 반응이었는데, 사실 기계에 정이 들었다.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그랬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다. 눈뜨자마자 가장 먼저 찾는 물건이자 잠들기 직전까지 내 곁에 두는 물건이었다. 직장인 시절부터 퇴사할 때까지, 이후 주머니 사정이 빈곤해졌을 때도,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자격증 공부에 매진할 때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친구도 가족도 아닌 스마트폰뿐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힘든 시절 도와준 친구에게 꼭 성공한 모습을 보여줘서 믿음에 보답하고 싶은 것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찾을 때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겪은 스마트폰은 갈수록 기능 저하가 심해졌다. 남들은 잘만 쓰는 와이파이를 잡지도 못하고, 앱을 실행하려고 해도 한참 걸리고, 때때로 위험 신호를 보내듯 화면에 가로로 초록 줄이 그어졌다.


    이게 다 내 탓인 것 같아 더 보내줄 수 없었다. 천성이 부주의하고 칠칠치 못한 손길 때문에 스마트폰 수명이 단축된 것 같았다. 길가다 보도블록에 떨어뜨린 횟수만 세어도 부지기수였다. 만사에 의욕이 없던 시절, 유튜브 중독으로 몇날 며칠 쉬지 않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연결한 채 누워서만 지낸 시기도 있었다. 하루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고 뻐근한 눈으로 충전을 나타내는 빨간색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문득 스마트폰이 가엾어졌다. 아무리 기기가 뜨거워져도 모른 척 영상에만 집중하던 내가 스마트폰을 혹사하는 무자비한 폭군 같았다. 휴대전화에 연결된 충전기 선도 꼭 링거주사처럼 보였다.



    개통한 지 7년이 지나자 휴대전화는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손길이 험한 주인 밑에서 네가 참 고생이 많다,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저절로 전원이 꺼져도, 터치가 인식되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 되어도, 100%까지 충전한 배터리가 충전기 단자를 뽑자마자 89%로 줄어도, 나는 휴대전화를 원망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세월의 흔적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다 아동센터로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수모의 나날이 이어졌다. 짓궂은 장난이 일상인 초등학생들은 날마다 내 휴대전화를 보고 말했다.

    “전화 언제 바꿀 거예요?”

    “이거 왜 잘 안 눌려요?”

    “검색이 왜 이렇게 느려요?”

    “선생님 거는 이런 기능 없죠?”

    “선생님, 돈 없어서 안 바꾸는 거예요?”


    센터에 다니는 아이들 중 삼분의 이 이상이 최신 기종을 썼기에 내 휴대전화는 매일 무시당하고 고물 취급을 당했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내 휴대전화를 가져가 이것저것 스티커를 붙였다. 내가 떼어내도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스티커가 생기면 또 붙였다. 나중엔 나도 어차피 더럽혀진 거 좀 붙이면 어떠랴 하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맘껏 붙이라고 허락했다. 나도 어느 새 내 휴대전화를 막 대해도 되는 물건으로 생각했고 메신저를 할 때 자판이 곧장 뜨지 않는 굼뜬 반응 속도가 갈수록 답답해졌다.


    스마트폰이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보이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최신 기종 스펙을 검색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결정적으로 포털사이트 앱을 이용해 미용실을 예약하려던 어느 날, 지원하지 않는 OS라는 알림창이 떴다. 이제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시기가 왔다는 걸 느꼈다.


    내 변심을 알아챈 듯 오래된 친구는 웬일로 멀쩡히 작동했다. 터치에 바로 반응하고 화면도 멀쩡하고 배터리도 천천히 줄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총기가 도는 순간이 온다던데 기계도 그런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내 기분은 꼭 그랬다. 나는 내 친구의 삶을 회상하고자 설치된 앱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설치만 하고 막상 쓰지 않은 앱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나씩 앱을 지우며 점점 비어가는 배경화면을 보니 한결 스마트폰이 편해 보였다. 아, 그동안 이 친구가 내 짐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이 친구의 짐이었구나.



    마지막으로 사진첩에 들어가 예전 사진부터 쭉 넘겨보았다. 거기에 내 욕망과 기분이 다 들어 있었다. 읽고 싶은 책, 자르고 싶은 머리 모양, 입고 싶은데 가격이 부담되는 옷, 가고 싶은 강연, 참가해보고 싶은 공모전, 땡볕에 주차장에서 알바할 때 지루해서 찍은 공터, 산책하다가 발길이 절로 멈출 정도로 예뻤던 털쌘구름…….


    한 번 날 잡고 사진을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끝내 하나도 정리하지 못한 정신 사나운 흔적을 보고 있자니 참 내가 이 친구를 많이도 고생 시켰구나 싶었다. 매순간 머릿속에서 새로 생겨나는 상념은 파도를 타듯 손끝으로 밀려나 휴대전화 안에서 차곡차곡 쌓였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지금 쓰고 있는 휴대전화에도 벌써 사진이 천 장 넘게 쌓였다.


    요즘은 틈나는 대로 이전 휴대전화에서 의미 있는 사진을 새 휴대전화로 옮기고 있다. 이전 기기로 찍은 마지막 사진은 비 오는 날 굴다리 밑 계단에서 만난 달팽이였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갔더라면 운동화 밑창에 깔렸을지도 모르는 느릿한 달팽이. 나는 쭈그리고 앉아 걱정되는 마음으로 달팽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쩌자고 이렇게 천천히 가니. 사람들이 여기를 얼마나 자주 오가는데. 내가 가만히 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달팽이의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달팽이가 계단을 다 가로지를 때까지 지켜주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봐 계속 쭈그려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손으로 달팽이를 가장자리로 옮겨주고 싶진 않았다. 그건 친절을 가장하여 달팽이의 속도를 무시하는 폭력의 손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달팽이는 무사히 계단을 가로질러갔을까 애잔한 마음으로 사진에 눈길을 두고 있는데 갑자기 양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휴대전화가 기능을 다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준 거 맞니?"

    남들은 8년 8개월도 오래 쓴 거라고 놀라워하지만 사실 쓰자면 더 쓸 수도 있었다. 빨리 좀 바꾸라고 잔소리하는 사람들을 귀찮아했지만 사실은 내심 등떠밀어줘서 고마웠던 건 아닌가. 내 변심을 가려주는 세상의 숨 가쁜 변화를 남몰래 즐기며 의리 있고 지조 있는 사람으로 체면을 있는 대로 다 챙기고 어쩔 수 없이 바꾸는 거라고 합리화를 한 건 아닌가.


    방전된 채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내 친구의 초라한 퇴장을 지켜보고 있자니 휴대전화가 진짜 사람이었다면 참 쓸쓸하겠다 싶다. 이 녀석도 처음엔 삼성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제품이었는데. 인기 드라마 속 PPL로 등장해서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제품이었는데. 하지만 영광은 잠깐일 뿐, 최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하는 신제품에 떠밀려 차츰 구식이 되어갔고 이제는 구석에 이르렀다.


    스마트폰이라는 용어가 꺼려진다. 갈수록 신제품은 더 똑똑해지고 상대적으로 이전에 나온 제품들은 해마다 천재에서 둔재로 전락할 테니까. 이 손바닥만 한 기계가 속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친구라면, 꼭 똑똑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은 새로운 휴대전화의 민첩한 반응 속도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이 친구가 뭐든지 빠르게 반응하는 친구보다는 오래 함께 갈 친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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