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물건을 사고 끝까지 쓴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물건의 본래 용도로 온전히 쓸 수 없을 정도로 쓴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리만 하더라도 길어야 석 달 쓰고 나면 손이 안 가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옷은 사면 살수록 가지지 못한 것이 아쉬워져 내키는 대로 사들이다 한 번도 안 입는 옷이 수두룩해진다.
이런 면에서 신발은 제 값어치를 톡톡히 해서 돈이 아깝지 않다. 나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늘 운동화를 신는데 그것도 딱 두 켤레를 사서 번갈아 신는다. 두 켤레에 큰 의미는 없다. 하나를 세탁소에 맡기는 동안 다른 걸 신어야 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까닭 때문이다. 색깔도 퍽 단조롭다. 검은색과 흰색. 가격은 9~10만 원대. 그것보다 싸면 발이 불편하거나 너무 일찍 닳고 그것보다 비싼 건 내가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해 의미가 없다.
신발만큼은 늘 끝을 본다. 도통 어디 갔는지 찾기 힘든 액세서리 따위와 달리 신발은 현관 말고 달리 둘 곳이 없으니 잃어버릴 일이 없고, 첫눈에 혹해서 샀다가 막상 쓰자니 불편해서 손이 안 가는 디자인 문구와 달리 매일 손이, 아니 발이 간다. 그래서 하루하루 꾸준히 쓰고 꾸준히 닳는다. 그게 아깝지 않고 보람차다.
128일. 2024년 5월 10일 사서 같은 해 9월 14일까지 운동화를 애용한 기간이다. 사흘 전 뾰족한 돌부리를 밟고 아파서 밑창을 봤더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보도블럭으로만 다녔는데 겨우 넉 달 남짓 만에 이렇게 되다니. 내 걸음걸이에 문제가 있나 의아하면서 내심 뿌듯했다. 나 좀 열심히 걸어다녔나 봐.
까닭 없이 사는 게 불안하고 초조할 때마다 나는 편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지칠 때까지 걸었다. 그 단순한 행위가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매번 신기했다. 생각해보면 걷는다는 건 수시로 몸의 중심을 새로 잡는 행위였다. 몸의 중심을 잡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중심도 찾는 걸까.
걷기는 참 좋은 운동이다. 제발에 맞는 운동화만 있으면 다른 준비물이 필요 없다. 평균 수준의 근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걷기의 그 비전문성이 맘에 든다. 대단한 각오와 결심 없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 이만큼 장점이 많은 행위가 또 있을까.
이 년 전만 하더라도 매번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다. 지도 앱을 켜서 걸어서 세 시간 안에 갈 수 있다 싶은 곳을 찍은 다음 길 찾기 기능을 사용해서 화살표를 따라갔다. 남들은 이것도 대단하다 하지만 솔직히 나에겐 약과였다. 십여 년 전엔 원 없이 걷고 싶어서 무전여행까지 했으니까. 서울에서 부안까지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걸어서 아흐레가 걸렸다.
지금은 똑같은 곳을 반복해서 걷는 게 좋다. 공원의 산책로를 하루에 열 바퀴, 많으면 서른 바퀴까지 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상황이 참 아늑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역시 나이가 든 걸까. 멀리 나가면 갈 땐 좋은데 언젠가 이 길을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금세 부담스럽고 피곤해진다. 하지만 산책로는 아무리 오래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니까 안심이 된다. 의욕이 넘쳐서 무조건 멀리, 오래 걸으려 했던 이십 대 때는 길바닥에 두서없이 낙서를 하는 것 같았는데, 매번 같은 곳을 정해진 시간만큼 걷는 지금은 정형에 맞춰 반듯하게 글월을 써내려가는 것 같달까.
평소 사람들은 그냥 걷지 않는다. 어디로 가려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걷기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고 수단이 된다. 하지만 출발점과 도착점이 같은 공원 안에서 걷기는 순수한 목적이 된다. 그래서 내 걸음새에 집중하게 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받는 압력, 무릎을 굽히는 각도, 골반 위치, 보폭, 속도까지 평소 의식하지 못한 내 몸을 비로소 하나씩 알아간다. 여기서 양심고백. 솔직히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 가끔은 노래에 심취해서 상념에 빠지거나 망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랴. 한껏 딴생각을 하다가 빠져나오면 스트레스가 풀리는걸.
누군가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걷는 걸 답답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매일 쳇바퀴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거니까. 하지만 부정적으로 쓰이는 이 상투적인 표현이 내 관점에서는 오히려 듣기 좋은 말이다. 남이 만들어놓은 쳇바퀴를 돌리는 거야 당연히 괴로울 것이다. 그런데 주체적으로 나만의 쳇바퀴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규칙을 세워나가는 건 정말이지 짜릿한 행복이다. 규칙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내일을 향한 불안이 점점 옅어지는 걸 경험하고 나서는 매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밑창이 다 닳은 신발을 보면 ‘그동안 내 안에 불안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불평할 수는 없다. 내 의지로 남들이 다 가는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했으니까. 후회하진 않지만 무모했다는 건 인정한다. 이제는 안다. 불안은 미래에서 오고 안정은 현실에서 찾아야 하는 걸. 그래서 한없이 푸른 하늘보다 그 하늘을 맘껏 올려다보도록 두 발을 붙들어주는 땅이 더 좋다.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죽기 전에 세상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참 혈기 왕성한 시기였구나 싶다. 자기를 주체하지 못할 만큼 넘치던 열정과 꿈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들 어떠랴. 내 발이 세상을 기억하면 되는 걸.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경험이고 귀중한 삶인 걸.
요즘 내 휴대전화 사진첩은 구름 사진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 물었다. 왜 이렇게 구름 사진을 많이 찍었냐고. 그제야 나도 고민해보았다. 답은 질문에 있었다. 사실 앞에 어떤 말이 빠졌다. 누군가 왜 이렇게 똑같은 구름 사진을 많이 찍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똑같은 구름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사진을 찍고 일 분만 지나도 아까 그 구름은 사라지고 다른 구름이 나타난다. 급격한 변화가 없을 뿐이지, 구름은 시시각각 위치와 모양과 색이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구름이 맘에 들면 다급히 휴대전화부터 들게 된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담는 것, 수시로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두고두고 꺼내볼 추억으로 바꾼다는 것, 그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구름 사진을 찍는 동기이다.
변화무쌍한 구름 덕분에 매번 똑같은 길을 걷는 게 지루하지 않다. 오늘 내가 어떤 하늘 아래를 지나고 있나 확인하려고 바삐 걷다가도 문득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같은 구름덩이도 몇 발짝 옮기고 나서 보면 느낌이 또 다르다. 꼭 유명한 곳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걷는 게 더 좋아졌다.
보기에 구름은 폭신하고 보드라울 것 같지만 막상 구름 속에 들어가면 얼마나 축축하고 불쾌하겠는가. 내겐 꿈이 그랬다. 누구는 포기하지 말라고 내 꿈을 응원하고 누구는 이제 슬슬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둘 다 진심으로 날 위한다는 가정 아래에서, 나는 전자인 사람들이 더 고마웠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 꿈은 이뤄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진짜 욕망을 마주하고 말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게 꿈을 이루는 것일까. 혹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어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이걸 인정하고 나니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혼자 방구석에서 뜬구름 잡는 상상을 멈추고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어울리며 내 위치를 똑똑히 깨달았다. 구름이 땅에 내려오면 안개일 뿐이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그러니 꿈속에서는 이리저리 헤맬 수밖에. 구름은 올려다볼 때 가장 예쁘고 멋있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남들보다 조금 늦게 깨달았지만 그만큼 부지런히 걸어갈 작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못생긴 내 두 발에게 심심한 사과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오늘도 가보자. 늘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