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일. 미처 정기 결제를 취소하지 못해 배송된 마스크를 일 년 넘게 가지고 있다가 이 주 전 드디어 다 썼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할 조짐이 보인다고 해서 오랜만에 쓰고 외출했는데 예전엔 이걸 어떻게 매일 썼나 싶을 만큼 갑갑했다. 어쨌든 처치 곤란이던 마스크를 다 처리했으니 속이 시원하다. 이제 국가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로 정하지 않는 이상 다시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마스크를 보기만 해도 미운 까닭은 장시간 착용으로 코에 모공이 커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스크 끈이 발목에 엉킨 새 사진을 보고 마음이 아팠기 때문도 아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생각보다 내가 훨씬 별로인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2020년 국내 코로나 첫 감염자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곧장 마트에 가서 마스크를 샀다. 그때만 해도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 나를 과민 반응하는 것처럼 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확진자와 직간접적 방법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잔뜩 부풀려 길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후 코로나는 거의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코로나는 왜 발생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 똑같은 질문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답을 내놓았고 기후 위기부터 음모론까지 불안을 종용하고 위기의식을 부추기는 온갖 정보가 미디어에 판쳤다. 어딜 보든 중국을 향한 혐오 반응이 있었고 동시에 한국 의료진을 향한 존경과 감사가 뒤따랐다.
당시 나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스트레스가 곱절로 늘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어서 오세요.”가 아니라 “마스크 착용해주세요.”였다. 아무리 출입문에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써 붙여도 그걸 못 보는 건지 못 보는 척 하는 건지 맨 얼굴로 들어오는 손님이 절반 이상이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듣는 것과 여러 번 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짜증날까. 비교하기 이전에 짚고 넘어갈 점은 둘 다 짜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써달라고 요청하면 (나처럼) 손님 얼굴에도 지겹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나마 여기서 마스크를 꺼내 써주면 감사할 따름. 안 들리는 척 무시해 버리거나 금방 나갈 거라고 대꾸해버리면 내 안에 짜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걸 분출하지도 못하고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으니 매일 최저시급에 과분한 스트레스를 얻어갈 수밖에.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썼다고 우기는 사람을 매일 상대하며 인류애가 소멸해갈 무렵, 한 손님이 맨얼굴로 편의점에 들어와서 얼른 마스크 매대로 향했다. 마스크가 없어서 마스크를 사러 온 손님에게 마스크를 써 달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헛웃음을 지을 무렵 그 손님이 애써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계산대로 왔다. ‘그래도 이 분은 자신의 실례를 인지하고 계시군.’ 이런 생각에 아무말 없이 계산을 끝내고 손님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확진자가 우리 편의점을 들렀다고. 그것도 마스크를 안 하고서. 얘기를 들어보니 어제 내가 마스크를 판 그 손님이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벽을 주먹으로 쳤다. 아팠다.
“일단 보건서 가서 검사 받고 와. 혹시 개인 차 타고 다녀올 수 있나?”
자차도 없고 면허증도 없는 나에게 점장님은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은 피하라고 했다. 잠재적 감염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었기에 한 시간 이십 분 거리를 걸어서 보건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말로만 듣던 뇌를 쑤시는 기분을 경험한 뒤 또 한 시간 이십 분을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만일 코로나 확진을 받으면 그 손님을 두고두고 저주하리라 이를 갈며 잠들었다. 하루에 손을 스무 번도 넘게 비누로 씻고,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매일 세 번 이상 지자체 누리집에 들어가 확진자 동선을 확인하고, 행여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절대 마스크에 손을 대지 않고, 가는 곳마다 아낌없이 소독제로 손을 혹사했던 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이후 코로나 증상이 발현되는지 시시각각 민감하게 몸 상태를 살폈다. 그저 이상 기온으로 더위를 느끼는 것뿐인데도 발열 증상으로 과대 해석했고, 실내가 건조해서 어쩌다 기침이 나오면 ‘역시!’ 하고 혼자서 확진 판정을 내렸다. 모든 신체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초조하게 보건소의 연락만 기다리다가 받은 문자는, ‘음성입니다.’ 그렇다. 내 몸의 면역 체계는 생각보다 훨씬 강인했다.
‘휴, 다행이다.’하는 안도는 순간이었고, 그 뒤를 이어 양성일까 음성일까 전전긍긍 고민했던 시간이 억울해지는 시간은 길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누구 탓을 하긴 해야겠어서 인터넷 댓글을 다독했는데 그게 내 맘을 다독였다. 밑도 끝도 없이 중국인을 매도하는 저열한 비난이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서도 자꾸 그런 글만 골라 읽었다. 대리 만족이었다. 나 또한 ‘중국 때문에’로 일상 속 모든 불편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걸 글자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뿌옇고 매캐한 연기로만 감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색적이고 원초적인 욕설이 그 무엇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이론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구체적인 원망의 대상은 일상 속에 있었다. 바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손님이었다. 알게 뭐람, 하는 표정으로 마스크를 써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이것저것 상품을 만지는 손님을 보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 공격적인 본능이 나 좀 해방시켜 달라고 쿵쿵 난동을 부렸다. 이런 순간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 손님을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정체를 숨기고 호시탐탐 나를 정복할 기회를 노리는 음흉한 바이러스로 보였다.
하루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들어오셨다. 구부정한 허리에 깡마른 체격이었고 걸음걸이는 느렸고 무엇보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어르신은 유유히 우유팩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왔다.
“마스크 써 주세요.”
“이게 얼만가?”
“…….”
어르신 뒤에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실랑이를 벌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나는 바코드를 찍어 가격을 말씀드렸다. 어르신은 동전지갑에서 반의 반의 반으로 접힌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낸 뒤 지갑을 뒤집어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서이, 너이…. 어르신이 세기 전에 나는 이미 눈으로 그 동전을 다 세었다. 우유 값으로는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어르신이 동전을 내밀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오백 원 더 주셔야 해요.”
“다 된 거지?"
“오백 원 모자라요!”
나는 어르신이 귀가 어두우신가 싶어 손바닥을 쫙 펴 ‘오백 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더 줘야 된다고?”
“네에.”
나는 자꾸 어르신과 대화를 섞는 게 탐탁치 않았다. 보이지 않는 비말이 내 얼굴에 얼마나 튀었을까, 그 생각에 자꾸 짜증이 치밀었다. 어르신은 아쉬운 듯 빈 지갑만 헤적이다 계산대 위 우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우유를 도로 갖다놓으려던 그 때,
“어르신 제가 보태 드릴게요.”
뒤에서 기다리던 손님이었다. 옷맵시가 단정한 중년 남성이었고, 해사한 얼굴에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그분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손에 쥐고 있던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나에게 건넸다.
“아이고, 고마워라. 잘 먹을게요.”
“아닙니다. 조심히 가세요.”
이 따뜻한 일화 속에서 내 역할이 악역이었음을 눈치 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 뜨거웠다. 제아무리 편의점 알바라도 오백 원 정도는 기꺼이 내줄 수 있었는데. 어쩌면 저 흰우유 500ml가 어르신의 한 끼 식사일 수도 있는데. 길거리에서 채소 파는 할머니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일 년 내내 감성의 우기 속에서 살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왜 이럴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건 코로나 때문이다.
그릇이 작은 내가 내린 옹졸한 결론이었다. 소인배다운 결론이다. 위기의 상황에 본성이 튀어나온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튀어나온 본성을 부정하고 위기의 상황을 탓해버리기. 참 멋지다.
2024년, 코로나 시대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요즘은 취향껏 귀여운 키링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게 유행인데 나는 흉측한 유령을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중이다. 유령의 실체는 바로 코로나 시대에 목도해 버린 누추한 내 본성. 덕분에 자기 확신이 확 쪼그라들었고 자아 존중감도 반토막이 났다. 유령과 작별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또 바이러스에 위협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도루묵이 될지도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순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좋은 사람보다는 별로지만 좋은 사람이 될 생각조차 없는 사람보다는 나으니까.
어쨌든 마스크여 안녕. 넌 내 얼굴의 반을 가리면서 인간성도 반나마 가려버렸던 잔인한 일회용품이었어. 네가 생필품이 되는 시대는 두 번 다시 안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