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년 전, 오로지 나의 실책으로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로 긴 시간 쌓아온 인연이 끊길 위기에 처하게 됐다. 당연히 변명처럼 들릴 줄 알지만 장담컨대 본의는 아니었다. 정말 본의였다면 절연을 결심한 그가 내 연락을 피하던 몇 날, 며칠을 오직 나를 탓하며 후회와 자책으로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까 봐 두렵고 또 두려웠다.
오랜 설득 끝에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됐던 날. 그가 내게 물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네가 뭘 잘못한 줄은 알고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그를 알아 온 수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냉정과 차가움. 하지만 그 외에 내가 기대한 그 무엇도 그의 목소리에는 담겨 있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원망도, 투정도, 트집도, 비아냥도 없었다. 그는 이미 미련 한 톨 없이 우리 관계를 정리한 것 같아서 마음은 한없이 불안해졌다. 그러자 내 대답에 따라서 이것이 정말로 우리의 끝이 될 수도 있겠다는 강렬한 예감이 찾아왔다.
마음에 한 번이라도 자리 잡은 상처는 어느 정도 옅어질 수야 있겠지만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잘못을 완전하게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저 사과를 통해 용서받을 길이 있을 뿐. 그래서 사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받은 이를 위한 반창고가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준 사람의 면죄부가 될 뿐이다. 그날 내게 더 간절했던 것은 반창고였을까, 면죄부였을까. 반창고든, 면죄부든. 어느 것이라도 얻기 위해서 나는 사과를 해야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사과만큼은 예외. 사과에는 분명한 지름길이 있다. 바로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 때문에 비겁한 변명으로 돌아가려 애를 쓰면 쓸수록, 미련한 핑계로 여유를 부리면 부릴수록, 영악한 계산으로 따지면 따질수록 사과는 점점 더 구차한 말장난이 되고 만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은 실수에서 비롯되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비열함으로 완전해진다.
그가 듣고 싶은 것이 '진실'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뭘 잘못했는지, 알기는 아는구나?'
훗날 그도 나에게 고백했다. 정말 다시 안 볼 생각이었다고. 아무리 내 진심을 읽었다고 해서 용서가 바로 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베푼 용서의 형태가 단순 면죄부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에 스스로 반창고를 붙여가며 계속 나를 만나주었다. 그러므로 용서가 어느 시점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내가 그로 인해 사과하는 법 그리고 용서를 기다리는 법을 깨닫던 그 과정 어디쯤에서 나의 잘못이 사해졌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다행히 나는 벼랑 끝 사과 한 번으로 그를 잃지 않음과 동시에 그 후로도 많은 사람을 지켜냈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사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사과만큼 명확하게 가야 할 길이 정해진 답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대신에 '왜'를 고집하면서 곧잘 틀린 답을 말한다. 잘못을 인정하면 나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까. 혹은 꽁꽁 감추어두고 싶은 나의 약점을 들켜버렸음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단지 당신의 오해일 뿐이라고.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의도를 숨길 수도 있겠지만 사과는 침묵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아무리 피하고, 감추고자 해도 결국 내뱉은 자신의 말 때문에 진의는 상대에게 들킬 수밖에 없다. 나름 고른 한 마디 한 마디,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진심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사과인지, 가짜 사과인지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과라는 자백을 통해서 서로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사과의 숨바꼭질에서 결코 무승부는 없다. 게임이 시작되면 적어도 한 명은 이 관계의 끝이 어디까지일지 알게 된다. 다만 당신이 진실을 찾아내는 술래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을 뿐이다.